“언니 미안해”
폭력, 테러, 폭발... 이런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말솜씨가 참하고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1987년 11월 29일 승무원과 탑승객 115명을 태운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마유미’ 김현희의 인상이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사악한 범죄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성스러움에 불같이 치솟았던 화가 잠시 누그러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는 기자회견장에 앉아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긴 머리 곱게 빗어 내린 조신함에는 저 꽃다운 처자를 악랄하게 이용해 먹은 북한에 더 분노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연민이 들게 했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87년부터 시한폭탄조작 등 특수훈련을 받으며 키워진 공작원임에는 틀림없었다.
참회의 눈물은 유족들과 희생자들의 눈물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1989년 오늘 서울지검공안1부는 KAL기 사건발생 1년 2개월여만에 김현희를 불구속 기소,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은 김현희에게 국가보안법상의 지령목적수행살인죄, 잠입탈출죄, 항공법상의 항공기폭파치사죄 등 7개 죄목을 적용했다. 그리고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의 목적수행 잠입탈출죄 등이 적용돼 사형을 확정했지만 4월 12일 정부는 김현희에게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유가족들의 항의와 불만 여론에도 불구하고 KAL기 폭파사건의 진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유일한 생존자라는게 이유였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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