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는 4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93년 3월 19일 ‘오늘’ 자주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이인모씨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양아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첫 발을 내 디뎠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100여명의 부산 시민과 재야인사들이 나와 무사 귀향을 기원했다. 그곳에는 더 이상의 이념적 대립이 필요치 않았다. 오직 한 노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현실이 되는 그 순간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해주고 있었다.
이인모씨는 그동안 자신을 치료해준 부산대병원 관계자들에게 “통일된 조국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글이 새겨진 볼펜 한 자루씩을 선물로 주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가 한국에 있었던 40여년이란 세월은 감옥과 함께였다.
이인모씨는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태어나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체포됐다. 빨치산 활동 중 1952년에 검거돼 감옥생활을 7년간 했고, 그 후 1961년 부산 지하당 활동혐의로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는 등 총 34년간 옥살이를 했다.
오랜 복역기간 중 한국으로의 전향을 거부해 비전향장기수가 됐다. 그것이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러 가기위한 한 가닥 희망이라고 생각 했는지 모른다. 1988년 그가 석방되면서 모 월간지에 사연이 전해지면서 이인모를 북으로 송환하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그리고 그를 더 애타게 만들었던 것은 1991년 남북회담을 취재하러 온 북측기자에 의해 이인모 부인의 편지가 전달되고 서로의 생사가 확인되면서, 귀향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소원이 됐다. 바람은 1992년 새 대통령을 맞으면서 이뤄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한 지 12일째만인 1993년 3월 9일 언론사 초청 만찬에서 ‘이인모 북송허용’을 전격 발표하면서 성사됐다.
23년 전 판문점은 이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를 맞기 위해 요란했다. 북은 배신하지 않은 영웅을 위해 최대한의 환영 행사를 열었다. 그곳에는 자신처럼 하얀 머리가 된 아내와 중년을 넘긴 딸 그리고 외손주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판문점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그는 한국 최초 ‘북송 비전향 장기수’가 됐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에서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 한 채 그리던 가족의 품에서 2007년 눈을 감을 수 있게 됐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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