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다섯 아이들 ‘개구리 소년’이 세상으로 나오기까지는 1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02년 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고등학교 신축공사를 하던 중 신발 5켤레와 유골4구가 발견됐다. 전 국민이 애타게 찾던 ‘그 아이들’ 이었다.
군경 50만명에 경찰 병력까지 투입돼 와룡산을 이 잡듯이 뒤졌어도 찾지 못했던 아이들이 바로 코앞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은 허탈해 했다.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들어간 것은 25년 전인 1991년 오늘(26일)이었다. 이 날은 5.16군사정변 이후 30년 만에 부활된 전국 시군구의회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일로 임시공휴일이었다.
당시 대구 달서 성서국민학교에 다니던 다섯 아이들은 도롱뇽 알을 채집하러 간다며 와룡산으로 올라간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이들의 실종 소식은 전국으로 퍼지며 ‘개구리 소년’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특별지시를 내려 검.경을 총 동원해 수색작업을 펼쳤으며 사람들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내 주변부터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실종 1년 만에 전단 22만부가 제작돼 전국에 뿌려졌고, 아이들을 주제로 한 영화, 이색가요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이 많이 구입하는 전화카드나 초코파이 등 과자 포장지에 아이들의 얼굴이 들어간 광고를 싣기도 했다.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찾아나서 이 잡듯 뒤졌어도 성과가 없자 북한 공작원 납치, UFO 납치, 생체실험 대상용으로 붙잡혀 갔다는 등 온갖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실제로 1997년 안기부 대구지부는 별도의 수사팀을 구성해 북한공작원 소행가능성을 수사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실종자 가족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종 5년째인 19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범죄심리학자인 김가원씨가 실종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집에 암매장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이 실종되던 날 지목된 아이 아버지의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이유였다. 경찰은 2시간 동안 발굴 작업을 펼쳤으나 결국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로 끝나버렸다.
긴 싸움은 사람들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기억도 흐릿하게 바래져 갔다. 미제사건으로 잊혀질 뻔 했던 사건은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다시 수사에 불붙는 듯 했다. 그러나 경찰은 길 잃은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 또 한 번 유가족들을 울렸다.
결국 법의학자들에 의해 타살로 추정된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수사는 범인에 대한 윤곽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06년 공소시효를 넘기면서 백골로 나타난 아이들의 한을 남긴 채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았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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