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는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들었습니다.
이에 인구는 급격히 늘었지만 주택이 턱 없이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산 중턱에 터를 잡기 시작했죠. 판잣집이 여기저기 병풍처럼 둘러쳐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무허가 건물을 정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불도저’라 소문이 난 박 대통령의 측근 김현옥 서울시장은 각 구청에 지시해 무허가 전수조사를 파악했고, 서민들에게 공급할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와우아파트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의 가파른 와우산 중턱에 자리 잡은 와우아파트는 마포구청이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6개월 만인 그 해 12월 26일에 착공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의 기술로도 상상이 안 가는 놀랄만한 속도인데요. 아니나 다를까 초고속 건설은 최악의 참사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준공 후 4개월도 안 된 1970년 4월 8일 주민들이 단잠에서 채 깨지도 않았을 오전 6시 40분께 갑자기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가 폭삭 주저앉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붕괴사고로 주민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다쳤으며,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아래에 있던 판잣집을 덮쳐 안에서 자고 있던 주민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입고 말았죠.
이것이 ‘날림공사’의 대명사였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였습니다.
사고의 불씨는 애초부터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무리한 주택 공급 정책과 부패한 행정관리 그리고 이윤에만 눈이 먼 건설업자가 만들어 낸 부실 건설의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얼마나 건설이 허점 투성이었는지, 당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철근 70개를 넣어야 유지되는 기둥에 5개의 철근을 넣을 정도였는가 하면, 기둥이 땅에서 2m 밑 암반이 아닌 흙 위에 세워졌습니다. 또한 부도를 낸 부실기업이 지명입찰을 받아 무자격업자에게 하청을 주는 등 특혜 의혹이 일었습니다.
거기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은 것은 시 공무원들이었죠. 이들은 업자로부터 대가를 받고 현장감독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런 부정행위는 고스란히 아파트 날림공사로 이어지면서 참사를 빚고 말았던 것이죠.
당시 가수 조영남이 이 사건을 비꼬기 위해 한 공연에서 노래 신고산 타령에 ‘우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개사를 해서 불렀다가 큰 곤욕을 치른 일화도 있습니다.
“와우아파트 와르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국민들 가슴도 와르르 무너졌던 안타까운 어제의 오늘이었습니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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