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신군부가 등장한 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떡고물’이라는 유행어가 돌았다. 말의 진원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신이었던 이후락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의 발언이었다. 194억 원(1980대 초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000만 원대였다 함) 대에 달하는 그의 재산 축적에 대한 항변은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의 권력이라면 떡고물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갈량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970년에는 중앙정보부장에까지 두루 섭렵하며 박 전 대통령의 2인자였다.
‘제갈조조’라는 명성에 맞게 44년 전인 1972년 오늘(2일) 극비에 평양행을 감행했다. 사상 첫 김일성과의 비밀회담을 위해 목숨을 건 북쪽행이었다. 그의 양복 윗도리 주머니에는 미리 준비해 간 청산가리가 들어있었지만, 다행히 청산가리 캡슐은 그대로 돌아왔다.
이후락이 평양을 다년 온 후 2개월 뒤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6.25 전쟁 이후 남북이 총칼을 겨누고 냉전 상태에 놓여있던 당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남북의 합의안은 신선함을 넘어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남북공동성명이 박정희와 김일성의 권력 강화를 위한 쇼가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역사적 성명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死)문서'가 됐고, 남북은 약속이나 한 듯 1인 독재정권 강화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은 그 해 10월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유신헌법’을 선포했고, 김일성도 주석제를 집어넣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어 1인 장기집권의 틀을 마련했다. 정적들의 루머라고 보기엔 아귀가 너무도 잘 맞아 7.4 남북공동성명의 진정성이 의심됐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민족 대단결로 이루자던 남북의 소원이 무색해진 어제의 오늘이었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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