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여성을 혐오하는 소년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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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여성을 혐오하는 소년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 승인 2016-05-30 14:42
  • 신문게재 2016-05-31 23면
  • 송지연 대전시민대학 교수송지연 대전시민대학 교수
▲ 송지연 대전시민대학 교수
▲ 송지연 대전시민대학 교수
여성을 혐오하는 소년들에게 러브레터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 설핏 있었다.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이 글이 딱히 그 러브레터라는 말은 아니다. 픽션적 구상이 되어야 할 테다. 영웅의 '웅(雄)'은 수컷을 의미한다. 승리한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마차에 묶어 그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끌고 다녔다. 그는 성자가 아니다. 폭력적인 '힘'을 가지고, 비극적 대립각을 세운 '적'을 통해 그 정체성이 뚜렷해지는 존재다. 문제는 현대의 문명사회가 “거세된 모험”의 공간이라는 데에 있다. 소설가 박민규의 표현이다. 그는 <톰 소여의 모험>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모험을 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때나마 우리는 모두 '소년'이었다. 전사 아킬레스가 지닌 원초적 남성성은 이제 게임 안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도전정신과 사냥본능을 추동하는 테스토스테론의 공격성이 판타지 RPG로 가상화되어버린 것이다. 게임 중독자의 성비는 자명하다.

새 시대의 영웅이란, 롤플레잉게임에서처럼 기성세대가 이미 만들어놓은 세계관 안에서 꽉 짜여진 매뉴얼대로 퀘스트를 수행함으로써 탄생된 '엄친아/엄친딸'이다. 성난 짐승과 맨몸으로 부딪치는 용맹도, 목숨 건 결투와 전쟁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항해도, 본능에 충실한 섹스까지-게임, 영화, 포르노 등의 '영상이라는 환상' 안에 안전하게 박제되고 얌전하게 복제되었다.

안전하고 얌전해진 현대사회에서 더 억압받는 것은 '남성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잃어버린 전사의 기억, 꽁꽁 묶이고 가두어진 영웅의 꿈. '초식남'으로 적응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음습하고 좁은 곳에서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던 욕망이, 도태된 누군가의 무의식에 광기와 병증으로 자리잡아 엉뚱하고 끔찍한 사건사고로 비화될까 두렵다.

누구나 모체에서 태어난다. 낸시 초도로우라는 페미니즘 이론가의 견해에 따르면 '남성성'이 성인 남자의 내면으로 성숙하는 길은 '여성성'이 성인 여자의 것이 되는 길보다 고통스럽고 지난하며 대결적인 과정을 밟는다고 한다. 뜻밖의 주장이다. 생득적 성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 적어도 무의식의 차원에서만큼은 여성이 더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모체와의 닮음 덕분이다.

그에 반해 남성의 '성'은 뒤틀리고 꼬일 위험성이 높다고 한다. 소년은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 모체에 대한 동경이나 회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나아가 내면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과정을 감당해야 한다. 안정적 동일시를 통하지 못하기에 혼란스럽고 취약하다는 것이다. 2차 성징 전후의 남자아이 또래집단에는 '힘'의 피라미드가 있기 마련인데, 이때에 왕따나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아이는 대체로 약한 아이, 여자 같은 아이다. 무엇을 부정해야 남자다움을 쟁취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아니무스: 여성 안의 남성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독려되는 추세다. 남성이 지닌 '아니마: 남성 안의 여성성' 역시 독려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실상은 안팎으로 짓밟히기 일쑤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사춘기가 유예되고 남초집단인 군대를 거치며 또 한번 성의식의 굴절과 억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공존이란, 뱀에게 먹히는 개구리 편을 드는 게 아닐 것이다. 자연은 생태계 먹이사슬의 한 단계를 모조리 없애버리면 공멸할 뿐임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언뜻 최정점에 놓인 포식자처럼 보이지만, 작은 균 따위에 의해 병들고 죽는다. 우리는 수백만 년 전부터 이미 남자였고 또 여자였다. 현재 부당하게 멸종된 성은 없다. 이런 현실이라면 차라리 우리의 상상력을 거기까지 끌고 갈 필요가 있다.

타나토스를 품은 에로스란, 사랑과 혐오의 양면이란, 살아있는 모두가 죽어가고 있음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불이 산소를 재료로 타오르듯 우리의 호흡도 산화와 노화를 끌어당기며 쉴새없이 죽음으로 달려간다. 삶이 본래 죽음을 불사하는 모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나를 사르는 것이다. 사르는 삶의 감각 훈련을 위해, 나는 그저 당신에게 바치는 관능의 러브레터를 써볼 요량이다. 살자, 살자, 살자꾸나.

송지연 대전시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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