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을 받고 있는 최석채 주필/사진=매일신문 |
1955년은 6.25의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때였다. 한반도는 휴전협정 체결 후 유엔 결의에 따른 중립국 감시단을 놓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당시 남측에서는 스위스와 스웨덴을 북측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포함됐다.
이승만 정권은 북측의 제시안에 ‘빨갱이 국가’가 웬 말이냐며 수용 불가를 외쳤고, 이를 대대적으로 규탄했다. 중립국 감시단 반대 데모는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하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했다. 대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늦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9월 10일 유엔 대사이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자 수많은 학생들이 수업을 전폐하고 땡볕 아래서 네 시간이나 서서 ‘체코, 폴란드’ 반대를 외쳤다.
▲ 대구매일신문의 파손된 공무국 내부와 사옥, 괴한들이 타고온 버스 모습/사진=1955년 9월 16일 동아일보 캡처 |
당시 대구매일신문 최석채 주필은 보다 못해 9월 13일자에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행정 관료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그 다음날 오후, 곤봉과 망치를 든 괴한 20명이 쳐들어왔다. 이들은 자유당 출범에 기여했던 국민회 경북본부 총무부차장과 자유당 경북도당부 감찰부장 등이 이끌고 온 청치 깡패들이었다. 이들은 인쇄 시설을 파괴하고 직원들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파견됐다. 그러나 경상북도 사찰 과장 신상수는 조사단에게 주옥같은 명언을 남겼다. “백주(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잡으라는 놈은 안 잡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가 보다. 경찰은 정치 깡패를 잡는 일은 접어둔 채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유는 사설이 북한방송에 인용돼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구속된 지 한 달만인 10월 14일 최석채 주필은 풀려났고 불구속 기소 상태에서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경찰과 검찰이 권력의 신하로 알아서 겼다면, 사법부는 일말의 양심을 지켰다. 12월 6일 법원은 최석채 주필에게 무죄를 언도했고 이듬해 1월 27일 검사의 공소를 기각, 무죄를 확인했으며 상고심이 열렸던 5월 8일 대법원은 전원 합의로 무죄를 확정했다.<매일신문 참조>
이는 해방 후 필화(筆禍)사건이 대법원까지 가서 판결 받은 첫 사례였으며, ‘억론직필’의 표상이 됐던 우리의 어제였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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