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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발신인 없는 택배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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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02-09 00:00 수정 2018-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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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
게티 이미지 뱅크
"택배요" 하는 소리에 눈을 돌려 쳐다보니 '발신인 없는 택배!'

어찌 그날의 추억을 잊을 수 있으랴!

거기다 "제 10회 TJB교육대상 대상에 유성고등학교 남상선 선생님!……."

우레와 같은 방청석 박수 소리에 연이어

"대상을 수상하신 유성고등학교 남상선 선생님의 수상 소감이 있으시겠습니다" 하는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다.

교직 말년에 나에게는 축복의 봇물이 터진 것 같았다. 행운 같은 좋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영세 직후 대전시 교육청 추천 9박 10일 뉴질랜드 호주 해외여행, 12월의 모범공무원상 수상, 해를 이어 12월에는 제 10회 TJB교육 대상이, 금상첨화를 실감케 했다. 전에 없었던 좋은 일들이 약속을 하고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례 후의 일들이어서 은총으로 내려진 선물 같았다. 천주교에 입문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마냥 인생의 화창한 봄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축년 9월 27일 나에게는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꺼지는 비운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그림자처럼 옆에 있던 아내가 치받는 영업용 택시를 감당하지 못하고 천국행을 한 것이다. 아내와의 동행 산책길 1m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멀고서도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만들고 만 것이다. 1미터를 사이에 두고 운명의 길을 달리한 것이다. 순간 나에게는 어제까지 빛나던 해도 달도 별도 없었다. 절규하는 통곡에 시야를 가리는 어둠의 암벽과 절망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남자한테 시집 와서 숱한 고생 다한 그 아내가, 수십 개 성상 바가지 한 번 긁지 않던 아내가, 자신의 분신인 남매한테 극진한 모성애를 기울였던 애들 엄마가, 우리 7남매의 어머니 역할까지 했던 동생들의 형수가, 아니 올케가…….

1인 3, 4인 역을 하면서도 온화한 모습으로 늘 마음 편케 해 주었던 그 천사가. 고3 담임 29년으로 가정조차 소홀히 했던 남편에게 찡그림 한 번 없었던 그 여인이, 아니, 바보 남편을 둔 그 슬기로웠던 아내가, 가정 평화의 수호신으로 속은 다 썩어 없어졌던 그 여인이, 그 흔한 핸드폰 사용도 마다했던 그 알뜰쟁이가. 세인의 입에 칭송으로 오르내렸던 그 아까운 나의 짝이, 슬픔과 맞바꾸는 아주아주 먼 길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예측할 수 없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더니 내 자신 그것을 실감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호사(好事)로 즐기고 웃을 때에는 지존(至尊)이었던 주님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내 몫이 되어버린 고분지통(叩盆之痛)이 그 원인이었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슬픔이 많다지만 그중에 크디큰 천붕지통(天崩之痛)의 슬픔도 아내의 죽음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변덕스런 감정은 기후 변화보다도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없는 현실은 눈물로 대신했다. 살기가 어려웠다. 즐거운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가 않았다. 아름다운 꽃을 보아도 그저 무덤덤 그 자체였다. 좋은 걸 보아도 좋은 것이 없었다. 기형화된 희로애락의 감정은 슬픔밖에 없었다.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었다. 식사 그 자체가 싫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삶의 의미가 퇴색돼 가고 있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지?"

"무엇하려고 교직 생활을 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나?"

하는 식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념이 현세를 멀리하고 있었다. 흉물스런 얼굴에 체중은 줄어들고 있었다. 수업을 하려 해도 의무감에 사로잡힌 허상만 있었지 내 본모습은 없었다. 점심때가 되면 으레껏 가는 교직원 식당이 가기가 싫었다. 점심을 비롯해서 거르는 끼니가 훨씬 많았다.

만년 흥부 같으신 교장 교감이 오찬 시간만 되면 나를 찾아 손을 끌고 식당으로 갔다. 평생 갚아도 빚으로 남는 고마움이었다. 나는 소문의 화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2월 스무날쯤 "택배요"하는 소리에 바라보니 '발신인 없는 택배'가 교무실로 배달됐다. 개봉해 보니 한방보약처럼 보였다. 나한테 오는 택배인가 확인을 거듭해 보았다. 틀림없이 내가 수취인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한약을 그냥 먹을 수는 없었다. 편지나 쪽지라도 있는지 샅샅이 찾아보았다. 발신인 단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약 봉지를 뒤적거리는 중 한약봉지에 씌어진 전화번호가 눈에 띄었다. 일련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약봉지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는 대전 유성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남상선교사입니다. 방금 전에 발신인이 없는 한약 택배를 받았는데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한약을 먹을 수 없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발신인 좀 알 수 없을까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기록해 놓은 것이 있으니 찾아보고 10분후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10분 후에 기다리던 서울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발신인은 30년 전 대전여고 제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가장 따뜻한 가슴을 가진 둔산여고 적을 둔 정길순 제자 교사였다. 세상의 어떤 무엇으로도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그 귀하고 소중한 정성과 사랑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마음씨가 나를 울리고 말았다. 천사가 보내준 감동의 행복감으로 손수건을 적시고 말았다.

집에 와서 전화를 걸었다. 물론 상대는 30년 전 천사표 제자였다. 얘기의 내용은 상처(喪妻)의 상심(傷心)으로 삶의 의미를 잃고 걱정스럽게 산다는 내 이야기를 제자가 들었다는 것이다. 마침 제자가 서울 여동생 집을 방문했다가 과거 대통령 주치의로 한약 처방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찾아가 한약 한 제를 지어 여동생에게 부치게 했다는 것이었다.

정성과 사랑의 덩어리 그 귀한 것 축내는 것이 아까워서 못 먹겠다며 눈물로 얼룩진 통화를 끝냈다. 얼룩진 눈물이 통화보다 많았을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눈물로 대신한 통화였지만 교감하는 감정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평생을 두고 음미해도 뭉클한 여운으로 남는 일을 하고서도 그 미행(美行)을 드러내지 않는 그 겸손, 그 미덕!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은근한 천리향 만리향을 풍기는 인품이었다. 나는 하늘의 천사가 내려 준 영약의 효능으로 살아가고 있다.

'발신인 없는 택배!'

이는 정성과 사랑으로 포장된 영약 중의 영약이 아닐는지……!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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