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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소풍에서는 달랑 김밥 하나에 찐 계란 두 개가 전부인 저를 은밀히 부르셔서 남 몰래 사이다와 초콜릿을 제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교사의 역할을 넘어 어머니의 모습까지 그리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과의 인연은 너무 짧았습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에 등교하니 선생님께선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추억은 44년 전부터 제 마음의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어려선 너처럼 어려웠단다. 하지만 그걸 이겨냈기에 오늘날이 있는 거야." "내 어려운 처지를 남과 비교하지 말거라. 남이 부러우면 그 순간부터 지는 거다. 남들이 널 부러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선생님, 선생님. 너무 그립습니다!" -
이상은 지난 2010년 5월 경 <사랑밭 새벽편지>의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필자의 글이다. 어머니가 남편과 아들마저 버리고 가출한 집구석은 항상 그렇게 구질구질했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같은 동네서 사셨던 유모할머니가 필자를 거둬주셨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밥보다는 수제비를 물리도록 먹어야만 했던 그 시절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봄 소풍을 간다니까 어찌어찌 김밥을 싸고 찐 계란 두 개까지 챙겨주셨던 할머니가 새삼 그렇게 그립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채효숙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다. 여덟 살 때 들어간 초등학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의 담임선생님 존함을 여전히 기억하는 건 너무도 감사한 그 시절이 오롯해서다.
그 즈음 선생님께서 주셨던 사이다와 초콜릿은 사실 나와 같은 흙수저 출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어떤 사치의 영역이었다. 지금은 몰라도 예전엔 소풍을 가자면 반드시 김밥을 싸야 했다. 김밥이 없으면 소풍의 재미 역시 반감되는 때문이었다.
김밥은 소금과 참기름으로 맛을 낸 밥을 시금치와 단무지, 당근, 달걀 등 속재료를 넣고 김으로 말아서 한입 크기로 썰어 낸 음식이다. 주먹밥처럼 이동할 때 먹기가 편하여 소풍이나 여행할 때 즐겨 먹는다. 김밥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국고유음식설'과 '일본 전래설'이 있다.
1800년대 말엽에 지어진 시의전서(是議全書) 기록의 김쌈에 대한 기록을 보면 "김쌈은 김을 손으로 문질러 잡티를 뜯는다. 손질한 김을 소반 위에 펴 놓고, 발갯깃으로 기름을 바르며 소금을 솔솔 뿌려 재우고 구웠다가 네모반듯하게 잘라 담고 복판에 꼬지를 꽂는다."라는 것으로 보아 기름을 김에 발라 구운 현재의 김과 유사한 형태의 김을 싸먹는 데 사용했지 싶다.
일본은 에도시대 교호 초기부터 김을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보다 훨씬 나중에 김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일본 김밥(후토마키)은 식초로 맛을 내지만 한국 김밥은 참기름으로 맛을 내므로 다른 태생의 음식이라는 주장을 펼쳐도 크게 무리는 아닐 성 싶다.
음식으로서 김을 언급한 최고의 기록은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지리지(1424년)'에 나온다는 설도 있다. 또한 1611년에 편찬된 '도문대작'에서는 김을 '해의(海依)'라 하고, '남해산 보다는 동해에서 건져 올려 말린 것이 가장 좋다'고 적어놓았다.
따라서 조선 초에 이미 김을 토산품으로 파는 지방이 있었고, 중기에는 각지에서 김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반 '동국세시기'에 보면 음력 정월 보름(상원날)에 김이나 마른 취에 밥을 싸서 먹는 복쌈이라는 풍속이 전해졌다고도 한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알려졌다나. 그래서 취나물을 볶고 김을 구워 취나물과 김으로 오곡밥을 싸서 먹는데, 그렇게 쌈을 먹으면 부(富)를 쌈 싸듯이 모을 수 있다는 풍습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김밥이라고 하면 단연 떠오르는 모습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사랑의 김밥'일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소풍을 간다고 하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정성껏 김밥을 쌌다. 먹고살기조차 힘들었던 50~60년대 세대들은 초등학교 시절 소풍 내지 운동회 전날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인해 밤잠까지 설치곤 했다.
왜냐면 이튿날 아침이면 환상의 '엄마표 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마치 애드벌룬처럼 커다란 때문이었다. 김밥은 70년 때까지만 해도 소풍이나 운동회 때나 먹는 '특식'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김밥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이제는 언제든 맛볼 수 있는 한국형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고급의 전문 김밥도 성업 중인데 소고기김밥과 치즈김밥, 떡갈비김밥 외에도 돈가스김밥과 불고기김밥도 먹을 만 하다.
편의점에서 여전히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김밥은 국물과 같이 먹어야 더 맛있다. 개인적으로 콩나물국과 같이 먹는 김밥이 최고의 맛이라고 믿고 있다. 어려서부터 음식 만드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덕분에 아내는 나를 일컬어 콩나물국을 잘 끓이는 달인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럼 기왕지사 말이 난 김에 콩나물국을 시원하게 잘 만드는 노하우를 전격 공개한다. 우선 손질한 콩나물을 잘 씻어 소금 반 주먹과 함께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한다.
끓기 시작하면 냉수를 넉넉히 더 붓고 다시 팔팔 끓인다. 이어 간을 보아 소금을 더 넣고 고춧가루와 썬 대파, 찧은 마늘과 다시다를 가미한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 그건 불의 강약 조절이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강중약(强中弱)으로 반복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콩나물의 진액이 모두 추출되는 때문이다. 김밥의 환상적 파트너인 콩나물(국)은 술꾼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숙취에 좋은 물질인 아스파라긴산을 함유하고 있다.
동의보감에도 콩나물이 사람의 근육과 뼈의 아픈 증상 치료와 염증 억제, 그리고 위의 속 열 제거에도 효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콩나물은 예전 채소가 없는 겨울철과 채소를 키우기 어려운 지역에서도 채소 대용으로 먹어왔는데 예나 지금이나 가격까지 착해서 금상첨화다.
콩나물과 돼지고기를 같이 조리하면 콩나물의 비타민과 무기질이 돼지고기의 단백질과 어우러져 영양 궁합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다. 단백질이 풍부한 선지는 식이섬유와 비타민 C가 없다. 따라서 선짓국에 콩나물을 넣어 조리하면 부족한 식이섬유와 비타민C를 보충해주어 영양학적으로도 그만이다.
다시 김밥으로 되돌아와 김밥은 포장이 간편하고 지참하기도 좋다. 물만 있어도 쉬 먹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각종의 고명과 밥까지 넉넉하기에 쌀 소비에 있어서도 일등공신이다. 맛난 김밥의 관건은 양질의 김이 필요한데 충남 홍성군의 '광천김'이 유명하다.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의 태안군과 경상도의 울산, 전라도 지역에서도 김을 궁중에 진상품으로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김을 양식했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을 결혼시킬 당시 예식장이 있는 수원까지 가느라 관광버스를 대절했다. 승차한 하객들이 드시라고 김밥과 떡, 음료와 주류까지 준비했다.
김은 칼륨 성분이 풍부하여 소화 작용을 돕고 나트륨 배출을 도와주는 기능이 있다. 또한 김의 타우린 성분은 간의 해독에도 좋다.
비타민 A와 요오드 성분에 더하여 칼슘이 풍부할 뿐 아니라 칼로리가 낮아서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여성들이 더 좋아하는 식품이 아닐까 싶다. 김밥 얘기를 하면서 '충무김밥'을 빠뜨린다면 섭섭하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경남 통영의 향토음식인 충무김밥은 어부의 아내가 바다에 나가면 식사 대신 술로 끼니를 대신하는(마치 필자처럼^^;) 남편을 위해 김밥을 만들어 준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충무에서 많이 나는 꼴뚜기를 반쯤 삭혀 양념무침을 하고 통영에서 나는 멸치젓갈을 넣은 무김치를 반찬으로 했다는 것이다.
충무김밥은 지역 상으로도 너무 먼 까닭에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다. 대신 필자는 유부초밥을 즐겨 만들어 먹는다. 유부는 '기름에 튀긴 두부'를 말하는데 일반 두부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쫄깃하며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요즘엔 유부초밥(재료)의 경쟁도 치열하여 한층 더 맛나는 초밥을 맛볼 수 있다. 단백질과 칼슘, 지질, 철분 등의 영양소가 풍부해 아이들의 성장발육에도 도움을 준다는 유부초밥에 된장을 풀어 구수하게 끓인 국을 곁들이면 임금님의 수라상도 부럽지 않다.
4월 20일은 곡우(穀雨)다. 곡우 무렵이면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된다. 그래서 곡우가 되면 농사에 가장 중요한 볍씨를 담그는데 이를 마치고 옆구리 터지지 않은 김밥에 적당히 익은 김치와 막걸리 한 사발이면 딱 어울리는 궁합일 것이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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