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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날 울린 무화과 열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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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08-10 00:00 수정 2018-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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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게티 이미지 뱅크
재직시절에 고맙게 해 주셨고 아껴 주셨던 이상목 교장댁을 찾아갔다. 고마움과 감사함을 주신 분들께는 세월이 지나도 일회성으로 지나치는 성격이 못돼서 여러 해 명절 때마다 하는 방문이었다.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교장님을 보고 인사를 했다. 교장께서는 꺼질 듯이 힘없는 얼굴에 만면의 미소로 눈길을 주셨다. 자고새는 숱한 시간의 지겨운 투병생활이 말소리 내는 것까지 앗아간 것 같았다. 중풍으로 방안에만 누워 있어 등창 때문에 살이 짓무르고 고름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퀴퀴한 냄새나는 병석의 몸이지만 사람이 그리워 손을 내밀었다. 안타까워 여린 손을 마주 잡고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덮개를 걷어 올리고 손과 발을 만져 보았다. 손은 그래도 온기가 있는데 발과 정강이는 잔설 속의 나무를 만지는 차가움이었다. 중풍이라 몸에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서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교장선생님 힘내세요. 요새는 의학이 발달해서 암도 거의 다 고치는 세상인데 굳은 의지로 힘내시면 머지않아 일어나실 것입니다. 빨리 쾌차하셔서 전에 매일같이 보내주시던 좋은 메일 또 보내주셔야죠! 교장선생님, 힘내셔요.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사람이 그리운 환자에게 말을 걸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드렸다.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 주로 내가 이야기하고 환자는 듣게만 하였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 어려웠다. 그냥 있기가 마음 편하질 않아 이불을 걷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전에는 그렇게 건강하고 풍채 좋았던 체구가 지금은 중풍이란 무법자 불청객의 침입으로 볼썽사나운 모습에 퀴퀴한 냄새만 풍기고 있었다.

몇 년 후의 나의 자화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다른 데 또 갈 곳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목례로 인사하고 방문을 나왔다. 거동이 불편한 교장 사모님이 따라 나오며 고맙다는 인사에 미안한 표정까지 얹었다.

무얼 좀 드리고 싶은데 아무것도 준비해 놓은 것이 없으니 이거 죄송하고 미안해서 어쩌나!"

작년까지는 방문 때마다 커다란 김 봉다리 하나씩 챙겨 주셨는데 경황이 없어 이번은 준비를 못한 것 같다. 장기간 중풍환자 수발들다 보니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아무 준비를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난처한 모습을 취하던 교장 사모님이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다가 뜰 앞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 쪽을 쳐다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를 흘려보냈다. 순간 땅에 닿을 정도 꼬부라진 허리에 무엇을 찾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무화과 열매를 따려고 막대기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2m 남짓한 나무막대기를 찾아냈다. 꼬부랑 허리에 가녀린 팔로 안간 힘을 다하여 무화과 열매를 헛치고 있었다. 지면 닿을 정도 심하게 구부러진 꼬부랑 할머니에겐 역부족이었다. 꼬부랑 허리로는 위를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정조준을 못하고 그냥 나무에 생채기만 내고 있었다. 무화과 익은 열매 하나라도 따 주고 싶어 막대기가 닿지 않는 나무를 이리 치고 저리 치는 것이었다. 열매가 닿지 않아 퍼붓는 막대기 세례에 애꿎은 잎사귀만 떨어지고 있었다. 과장 없이 50㎝ 정도 부족하여 땅에 닿지 않은 꼬부라진 허리에 안간 힘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눈물이 부족하면 꿔다가라도 눈시울을 적시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새어나오는 액체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고금에 볼 수 없는 감동이었다. 순간 나는 코끝이 찡하여 울보 근성을 보이고 말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렁그렁한 눈물은 지리부도에도 없는 신시가지 지도를 뺨에 그리고 있었다. 방에서 볼을 적시고 나온 뒤였지만 그래도 눈가 적실 눈물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작년에도 아니, 재작년에도 보았던 같은 무화과 열매이었건만 오늘의 열매는 왜 이리 사람의 가슴을 후며 파는 아픔을 주는지 모르겠다. 거기엔 꼬부랑 할머니의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정성과 사랑을 훈훈한 정으로 수놓고 있는 마법사의 요술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치로 헤아릴 수 없는 정성과 사랑에 눈시울은 적셨지만 마음 한 구석은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무르녹고 있었다.

'날 울린 무화과 열매!'

여기엔 동서고금 어떤 과일에도 들어 있지 않은 망구(望九) 꼬부랑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발효되어 따뜻한 가슴으로 숨 쉬고 있었다.

감동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큰돈으로 사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금은보석으로, 권세로 강매해오는 것도 아니다. 거기엔 가식 없는 진실과 사랑과 서로를 위하는 가슴의 정성만 담겨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날 울린 무화과 열매!'

이것은 단돈 천 원도 안 되는 열매였지만 여기엔 노구 꼬부랑 할머니의 진실과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는 것이어서 그 어떤 과일도 대신할 수 없는 값비싼 것이었다.

열매는 이리 맞고 저리 맞아 다 일그러진 모습의 것이었지만 행복감을 안겨주는 신생아 산실보다 나았다. 이 울보의 숨겨놓은 눈물까지 모두 앗아간 '날 울린 무화과 열매!'

이런 위력의 요술열매라 한다면 내년이고 후년이고 자주 가서 눈시울을 적시고 싶소이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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