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오피니언 > 여론광장

[박광기의 행복찾기] 기록하는 일

박광기 대전대학교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교수

  • 폰트 작게
  • 폰트 크게

입력 2019-07-19 00:00 수정 2019-07-19 00:00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
  • 밴드
  • 프린트
전자결재 시스템이 보편화되면서 거의 모든 관공서나 기관, 학교 그리고 기업에서 직접 서명하는 결재문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른 기관이나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거나 협정 또는 협약을 하면서 직접 서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대·내외 문서는 이제 전자결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전자결재가 도입되었을 때, 직접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고 서명이 없이 결재권자의 이름과 날자만 기록되는 전자결재문서의 신뢰성에 의심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자결재를 통해 업무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직접 서명하는 결재는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자결재의 장점은 참 많습니다. 우선 전자결재를 통해 직접 대면하지 않고 결재를 요청할 수 있으니 결재권자가 사무실에 없더라도 결재를 상신할 수 있고, 컴퓨터가 있는 곳이면 사무실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지 업무를 보고 결재를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지시사항이나 보완사항을 메모나 의견 기술을 통해서 신속히 전달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결재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결재의 가장 큰 장점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핸드폰만 있으면 결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별도의 결재시간을 따로 정할 필요도 없고 업무시간에 반드시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자결재가 업무환경에 정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자결재로 인한 업무환경의 변화는 하나하나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전자결재로 인해서 업무 중 생산되는 각종의 서류들이 빠짐없이 보관되고 정리되는 것은 전자결재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 종이결재는 관리자의 착오나 실수로 중요한 문건들이 누락되거나 분실될 우려도 있고, 또 의도적으로 문건을 훼손시킬 수도 있는데 전자결재는 이런 부분들을 자동으로 저장하고 분류하고 문건 생성의 모든 기록이 보관된다는 점에서 행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전자결재 시스템을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전자결재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키거나 해킹 또는 서버 파손이나 파괴 등으로 의도적으로 기록을 유출하거나 불리한 자료나 기록을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안 및 백업 등 기술적인 방어 장치를 도입하여 운영한다면 기본적으로 전자결재는 이런 부정적인 요인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전자결재 시스템의 기록보존 기능은 어찌 보면 우리 선조들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대표적이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우리가 과거부터 기록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왕조의 모든 기록을 관리하는 별도의 관리를 두고 그 관리에게 엄격한 권한을 부여하여 모든 사안을 기록한 사초(史草)를 작성하게 한 것은 바로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입니다. 사실 모아진 기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록의 활용이 아니라 기록을 한다는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일부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기록을 통해 역사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기록은 반드시 문서나 문자로만 남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서나 문자로 남긴 기록은 다른 것보다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이나 상징, 습관, 습성 그리고 전통도 일종의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각자의 가문이나 가정에 남아 있는 가풍 또한 하나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집단이나 기관, 단체에 문자나 문서로 남아있지 않은 분위기와 성향도 일종의 기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기록은 바로 문서와 문자로 남아 있는 기록입니다. 우리 사회는 과거 기록을 중요시했지만, 근대화가 되고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기록물을 근거로 탄압하고 억압하는 풍토를 겪으면서 우리는 기록을 남긴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일종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서나 문건, 또는 녹음이나 녹취, 영상물 등의 기록을 남김에 있어서 주저하거나 또는 사실 그대로가 아닌 의도적인 각색이나 편집으로 '사실이 아닌 기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실이 아닌 기록'은 기록으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지난 주 연구실을 일부 정리하면서 대학에 처음 임용된 직후 작성한 각종의 서류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류들을 보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보편화된 연구실적 관리체계의 도입으로 인해서 개인 업적관리, 학생상담을 비롯해서 당시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대학시스템 도입과정 등등 불과 20여 년 전의 일들임에도 기억하지 않고 있던 일들이 그것입니다. 이 서류들을 보면서 정리하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리를 중단한 것은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책장 한 구석에 보관하고 있는 대학재학 중 사용한 필기노트를 보면서 이 서류들 역시 그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버리고 정리하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으나, 한번 버린 기록을 다시 찾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독일 유학시절 뮌헨 구시가지에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하다가 옛 성터가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주차장 건설을 하자는 주장과 성터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수년간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 것으로, 결국 수년간의 논의 끝에 공사를 중단하고 있는 그대로 다시 원 상태로 돌리는 결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결정을 후대에게 유보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결단을 못하고 후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바꾸거나 훼손하는 것은 우리가 해서도 안 되고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판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개인의 역사나 기록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삶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비단 자식들에게 부모의 인생을 이해시키고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기록을 통해 돌아본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쓰여 지는 삶의 기록은 있는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주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잘못을 방어하기 위해 쓰는 기록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돌아보는 삶의 기록은 나름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의 기록을 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한 주말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전대학교 대학원장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광기 올림

박광기교수-220

포토뉴스

  • [포토]식탁에 올린 `크리스마스` [포토]식탁에 올린 '크리스마스'

  • 대전 유성구, 산타발대식 개최… "소원을 말해봐" 프로젝트 대전 유성구, 산타발대식 개최… "소원을 말해봐" 프로젝트

  •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 제21대 총선 불출마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 제21대 총선 불출마

  •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버스는 언제 오나?’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버스는 언제 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