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Episode.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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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Episode.26

마지막 편지

  • 승인 2020-01-19 19:36
  • 한성일 기자한성일 기자
리야드연가 책표지 완성본(7월4일)
에피소드26
[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 Episode.26 마지막 편지

신께서 당신을 건강한 삶으로 인도하시길….







걸프 만에서 다국적군과 이라크 간의 전쟁은 1월 중순에 시작해서 2월 28일, 부시대통령이 종전선언을 하면서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다. CNN뉴스는 종전선언뿐만 아니라, 쿠웨이트 유전 시설이 대부분 불타는 모습을 항공촬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뉴스를 지켜보면서 마호멧이 이제 할 일이 태산 같겠다 싶었다. 저 불을 언제 다 끄니, 했다.

그런데 전쟁 와중에도 바람둥이는 바람 피우고 다 하는 모양이다. 압둘라 닥터 칩 대학 후배인 핫산이 우거지상이 돼서 외래검사센터를 방문했다. 한 달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전쟁 통에 꽁무니 뺐구나 싶었다. 핫산은 병원원무과에 근무한다. 건설업을 하는 아버지를 둔 부잣집 아들이다. 그는 종교경찰에 걸려서 곤장 50대를 맞고 감옥에서 한 달 콩밥 먹고 나왔다고 실토했다. 부모 허락 없이 비밀연애를 하다 걸렸단다.



경찰서에서 취조 받는데, 양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그냥 즐긴 사이라고 말했다가 대형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여자 친구는 일가친척들에게 소문이 나 혼사 길이 막힌 모양이었다. 압둘라 닥터 칩은 잘하면 나이든 중년 아저씨 둘째 부인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고 혀를 찼다.

"핫산은 엉덩이 맞으면 그만이고, 여자는 인생 망치면 그만인가요?"

나는 고개를 끼우뚱했다.

"핫산은 지금까지 만난 여자 친구만 몇 명인지 몰라. 여자 쪽에서 지참금 없어도 된다고 결혼만 하자고 했는데 싫다고 했대. 사실 돈이야 아쉬울 게 없는 친군데…. 결혼은 구속이라나. 몰래하는 연애가 맛이 좋다나. 하하하."

"이게 웃을 일이에요. 여자 쪽에선 지참금도 필요 없다. 뭐예요? 결혼을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하겠다면 합의금이라도 뜯어내야지. 둘 다 돈 아쉬운지 모르니까 저 모양이라고요."

내 일도 아닌데 내가 더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압둘라 닥터 칩은 요새 뭔 일 있냐며 여자들 한 달에 한 번 하는 그 날이냐며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다.

"핫산 부모는 사촌끼리 결혼시켜려고 준비 중이거든. 가문을 중시하는 부모라서. 핫산은 그게 싫은 거지. 내가 봤을 땐 오히려 핫산 부모가 방해를 놓았을 수도 있어."

"뭐예요? 사촌끼리 하면 근친결혼이잖아요. 유전학적으로도 안 좋고…."

"사우디에도 언젠가는 자유연애가 가능하겠지. 기다려 봐야지."

압둘라 닥터 칩은 꼭 나는 결혼했으니까 상관없고, 하는 식이다.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괜히 우울해졌다. 결혼적령기인데다 마호멧과 알아가는 사이라 더 그랬다.



전쟁이 끝나고 한 달 뒤, 병원장은 대폭적인 인사발령을 준비했다. 병원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했다. 걸프전쟁 때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닥터들이 재취업신청을 해왔고,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한국에서도 파견근무자를 모집했다. 한동안 병원이 다시 어수선할 것 같았다.

루루가 오후 근무시간 전에 찾아왔다. 그녀는 마호멧에게서 온 밀봉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오빠는 지금 똥 쌀 시간도 없는 게 아니라 진똥 싸고 있단다. 처형된 쿠웨이트인 시신부터 이라크군 시체까지 수습하고, 유전 불길 잡는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애먹고 있단다.

"이 편지는 따로 전해달라고 해서 가져왔어요."

그녀는 'Dear, Miss Su Jin'이라고 쓰진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Darling' 이라는 표현을 은근히 바랬나 보다.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고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Darling'이라고 쓰여 있었다면 편지에다 뽀뽀를 할 뻔했다. 편지 내용이 궁금했지만 기숙사에 돌아가서야 편지를 꺼내보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읽고 싶었다.



Dear Miss Su Jin.(친애하는 수진 양)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편지를 씁니다.

리야드는 피해가 없었다고 해서 안심했습니다.

병원장인 삼촌이 한국 직원은 끝까지 남아 환자를 지켰다고 칭찬이 대단하더군요.

나는 쿠웨이트 시티에 들어와 있어요.

이라크 군이 휩쓸고 간 전쟁의 한복판이죠.

전쟁은 끝이 났지만 수습은 끝이 보이지 않네요.

지금까지 처형된 시체부터 죽은 군인까지 수습하고 대책본부를 꾸리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죽은 몸이지만 그들이 고향에서라도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밤에 악몽에 시달려서 잠을 설치기도 해요.

부서진 건물을 파헤치면 검게 탄 시체가 쏟아집니다.

하늘을 보는 척하며 눈물을 숨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매일 이슬람 형제나라들이 저지른 참상을 보자니 헛구역질이 납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면 이것이 알라의 뜻입니까,

인샬라!, 인샬라! 하며 짐승처럼 부르짖죠.

미스 수진에겐 내 가족에게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부디 이 편지는 다 읽고 나면 편지를 불살라 주세요.

알라를 원망했다면 나의 나약함 때문이지 그 분이 위대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나는 이 전쟁 수습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중동에는 머물 수 없을 것 같네요.

내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근본주의 종교 국가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아요. 나는 자유로운 영혼도 아니고,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려고 해도 내 속엔 슬픔이 너무 많네요. 당신에게서 배운 삶의 지혜가 이 전쟁 통에서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렇다고, 누굴 원망하며, 남 탓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위기를 모면하려는 위선자들이나 하는 짓이죠.

미국에 가서 어머니하고 지낼 생각이에요.

내 조국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네요. 그리고 비평하고 비평하고…, 근본주의자들을 넘어 무함마드 예언자의 외투를 입고, 관용과 평화의 이슬람 사상을 전파하는 저술가가 돼 볼까 합니다.

인샬라!

그대에게 내 삶의 동행자가 되어달라고 감히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 또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얽어 매는 인습이니깐요. 내가 그런 사회에 살아왔는데 또 누구에게 굴레를 씌울 수는 없습니다.

부디 행복하시길.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 아웃사이더 프린스 마호멧이



푼수기 많고, 단순한 내가 처음으로 마음 깊이 울었다. 짐승처럼 소리 내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칼처럼 심장을 찔려와 아리고 아팠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닦아내며 허둥지둥 빈 편지지를 찾았다. 그에게 꼭 이 말만은 전해주고 싶었다.



Dear, Outside Prince



그동안 몸도 마음도 고생이 많았죠.

루루에게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 두고두고 읽고 있습니다.

사막의 모래폭풍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칫 휩쓸려 가지나 않았을까, 매일 새벽, 일어날 때 마다 동네 모스크에서 들리는 아잔의 소리에 맞춰 기도했습니다.

그대가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빌었습니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아닌 누구를 위해 이렇게 간절히 두 손을 모아 보진 못했습니다.



나는 편지를 쓰다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다락방 기도를 했었다. 누구에게 내 기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중 앞에서 떠들지 않아도, 골방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신이 있다면 들으시리라 믿었다. 그 신은 내 기도대로 그를 건강한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그를 슬픔에 묻어두지 않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도록 인도했다.

어린 왕자 책에 등장하는 사막 여우의 말처럼 길들여짐으로 수백 송이 중에 한 장미가 아닌 나 만의 장미가 되고, 수만 마리 중에 한 여우가 아닌 나의 여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길들인 시간만으로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갈구가 있다면 그 영혼은 자유로워야 한다.

나는 편지를 이어 썼다.



나에게도 좋은 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사우디에서 일할 수 있는 영광도, 그대를 만난 축복도 감사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추억이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겠지만, 그대와의 만남은 결코 잊혀지지 않겠죠.

수습 잘 하고, 몸조심 하세요.

인샬라!

신께서 당신을 건강한 삶으로 인도하시길.

- 세헤라자데. 수진이



내 머릿속에선 늘 두 녀석이 다투기도 해요. 지금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말하네요.

나쁜 천사 : 꼭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챙겨먹어.

착한 악마 : 밥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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