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캄보디아 씨엠립의 거리에서 구운 바나나와 감자를 팔고 있다. |
씨엠립의 거리에서 한국-캄보디아 우정의 도로 표지석이 보인다 |
여행 전에 읽은 여러 책에서 캄보디아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비슷하다고 소개했는데, 이는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그리고 독립을 이루는 과정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1967년에는 공산당의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1970년 시아누크 국왕이 외국을 방문하는 사이 쿠데타가 일어나 론 놀(Lon Nol) 장군이 새 정부 수반이 되는 역사도 한국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
특히, 크메르루즈군이 베트남의 침공을 피해 태국 국격의 산악지역으로 후퇴했을 때는 베트남 지원으로 캄보디아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됐고, 또 이를 견제하려 태국, 중국, 미국이 지원한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가 만들어졌다는 역사에서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씨엠립 주민들의 아침식사는 역시 우리식 표현으로 쌀국수 또는 볶음밥 형태의 간편한 식사가 대세인 듯 했다.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쇠고기 뼈로 국물을 낸 쌀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셨는데 식당에서도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는 게 인상적이었다. 또 단출하게 나온 상추잎과 고추 모양의 채소가 상당히 싱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 내내 캄보디아 음식이 입맛에 잘 맞았는데 채소류의 맛과 싱싱함은 먹는 내내 감격을 느낄 정도였다. 여행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토질은 대부분 황토인데 농사짓기 적합하고 한국인이 이곳에서 직접 농사짓는 교포도 있다고 했다.
거리에서 구워 파는 바나나와 감자를 한 봉지 사고 이어 야자수까지 한 입 마시면서 캄보디아에 와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킬링필드의 역사를 간진한 와트마이 사원의 유해비 |
목에 빨간 손수건을 둘러 '붉은 크메르'라는 의미의 크레르루주, 그리고 최고 권위자였던 폴 포트. 1975년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전직 고위관료들은 대부분 처형됐고, 사유재산과 이동의 자유가 박탈됐으며 화폐의 거래도 금지됐다. 그리고 도시의 일반 시민들은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에 의한 식량 증산에 동원됐고 불평분자는 즉결처분됐다. 과도한 노동과 기아 질병 그리고 정치 보복 속에 수많은 캄보디아 인들이 죽어갔다.
당시 희생된 캄보디아인이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대략 100만에서 1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캄보디아 현재 인구가 1500만 명 가량이고 당시 전체인구는 800만 명쯤으로 추산한다면 인구의 8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와트마이 사원에는 전시된 유골 옆에 킬링필드 당시의 상황을 사진과 글로 설명했는데, 폴 포트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으며, 캄보디아에 돌아와서는 잠시 고등학교 선생님을 했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 공산당 활동을 시작해 무장투쟁을 통해 1975년 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군이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식량증산을 위해 농촌으로 끌려난 캄보디아인들은 하루에 12시간씩 노동을 하고도 식량이 없어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또 크메르루주의 군인들은 15세 미만의 젊은 소년들이 많았는데 가난에 찌든 무산계급으로 총·칼을 잔인하게 휘둘렀다.
폴 포트는 1979년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권좌에서 쫓겨나 서북부 밀림에서 19년 숨어지내다 1998년 4월 숨진 채 발견됐다. 지금껏 자살로 추정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jjU79PXQG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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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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