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고맙다

  • 오피니언
  • 세상보기

[세상보기]고맙다

  • 승인 2018-01-25 09:00
  • 수정 2018-01-25 10:53
  •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엄마가 죽는 날까지 놓지 않았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몸으로 이해하는데 50년이 걸렸다. 삶이 퍽퍽하고 고단함의 연속인데 엄마는 "고맙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하루가 힘든 일 투성인데 고맙다는 말을 쓸 일이 생각보다 나에게 많지 않았다. 엄마의 삶 역시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칠남매를 키웠다. 엄마의 삶을 여기서 다 꺼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삶을 걸어왔는데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엄마처럼 세상을 이해하고 그 삶의 공간에서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땀을 흘려 번 돈으로 밥 먹고 옷 사 입고 내 집은 아니지만 비바람 피할 공간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누군가의 땀이 밥에 담겨 있고 옷이 집에, 누군가의 아버지 엄마 아들 딸들의 손길이 닿아 내가 살고 있다고 머릿속으로는 열 번 백 번 생각해 보지만 상대방에게 화낼 일이 생기면 그런 마음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내키는 대로 성질을 부리고 뒤늦게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누구에게 손 내민 일도 없는데 무엇이 그리 고마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는 나의 모습이었다. 막 말로 내 돈 내고 내가 알아서 하는데 고맙기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어서인지 알 수 없는 손들이 나를 따듯하게 해주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엄마의 말이 조금씩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는 틈이 생겨났다.



고맙다는 말, 아직은 서툴고 낯설어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굼벵이 같지만 조금씩 표현해 보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도 그랬을 것 같다. 하루 벌어 새끼들 밥 먹이는데도 버거웠던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그 시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엄마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몸을 풀어준 것도 고맙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몸에 뭉친 삶의 흔적들을 나이 먹어도 계속 가지고 간다면 그야말로 천근만근 납덩이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내 주변도 행복하고 내 식구들도 행복해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늘도 스치듯이 지나갔다. 인연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입고 쓰고 먹는 부분에 관여한 사람들이다. 부부의 연이나 친구의 연까지는 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고마운 분들이다. 엄마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작년부터 버스를 타면 기사님께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조금 쑥쓰럽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썰렁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안녕하세요"를 하며 타는 버스는 마음이 편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타고 내릴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기사님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은 따듯해 졌다.

이제는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릴 때도 "고맙습니다. 기사님."이라는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탈 때의 인사(안녕하세요)보다 쉽지가 않았다. 목소리도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고 서툴고 쑥스러웠다. 엄마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삶을 짓눌렀던 무게를 이겨내며 고맙다는 말을 끌어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망설이고 낯설었을지 짐작이 갔다.

지금은 버스를 탈 때 "안녕하세요." 내릴 때 "고맙습니다."를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니까 만원 버스를 타도 불펀하고 짜증섞인 생각들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늘 거리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스치듯이 만난 누군가는 누군가의 아버지, 엄마, 아들, 딸들이다. 그들이 있어 고마운 일이라고 표현하면 추위도 외로움도 잠시나마 덜 탈 것 같다.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이스라엘, 이란 보복 공격에 건설업계 '긴장'
  2. 윤석열 대통령-이재명 대표 다음주 ‘용산 회동’ 성사되나
  3. [날씨] 20일부터 비 오며 다시 서늘…대전 낮 최고기온 18도
  4. 대전극동방송 창립 35주년 기념 희망콘서트 봄.봄.봄
  5. [아침을 여는 명언 캘리] 2024년 4월19일 금요일
  1. "미래 선도하는 창의융합 인재로" 대전교육청 과학의 날 기념식 개최
  2. 보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활동지원팀 오지희 팀장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3. '2025년 의대 정원' 1000명 선까지 낮춰 정한다
  4. 의대증원 규모 대학에서 자율적 판단키로…"원점재검토를" 목소리
  5. 근로복지공단, 푸른씨앗 전국 1만5600개 사업장 가입

헤드라인 뉴스


소진공 본사 유성구 이전 확정… 중구 “원도심 버리나” 거센반발

소진공 본사 유성구 이전 확정… 중구 “원도심 버리나” 거센반발

대전 중구 원도심에 있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유성구 신도심으로 이전하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소진공을 지켜내야 하는 중구는 정치권까지 나서 이전에 전면 반대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반면, 유성구는 중구의 강력한 반발을 의식해 대체로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적극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18일 소진공이 유성구 지족동 인근 건물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중구 정치권에서는 잇따라 반대 입장을 내며 적극 만류에 나섰다. 김제선 중구청장은 이날 중..

윤 대통령, 4·19혁명 기념 참배… 조국당 “혼자 참배” 비판
윤 대통령, 4·19혁명 기념 참배… 조국당 “혼자 참배” 비판

제64주년 4·19혁명을 기념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참배를 놓고 조국혁신당이 “여야와 정부 요인도 없이 ‘혼자’ 참배했다”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19일 오전 8시 서울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참배에는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과 오경섭 4·19민주혁명회장, 정중섭 4·19혁명희생자유족회장, 박훈 4·19혁명공로자회장, 정용상 (사)4월회 회장, 김기병 4·19공법단체총연합회 의장 등이 함께했다. 사의를 표명한 대통령실 이관섭 비서실장과 장호진 국가안보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인성환 국가안보..

소진공 이전 후폭풍… 중구 강력반발 유성구 신중 속 환영 감지
소진공 이전 후폭풍… 중구 강력반발 유성구 신중 속 환영 감지

대전 중구 원도심에 있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유성구 신도심으로 이전하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소진공을 지켜내야 하는 중구는 정치권까지 나서 이전에 전면 반대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반면, 유성구는 중구의 강력한 반발을 의식해 대체로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적극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18일 소진공이 유성구 지족동 인근 건물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중구 정치권에서는 잇따라 반대 입장을 내며 적극 만류에 나섰다. 김제선 중구청장은 이날 중..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선거 끝난지가 언젠데’ ‘선거 끝난지가 언젠데’

  • 4월의 여름 풍경 4월의 여름 풍경

  • 선거 및 폐현수막의 화려한 변신 선거 및 폐현수막의 화려한 변신

  • ‘원색의 빛’ 뽐내는 4월의 봄 ‘원색의 빛’ 뽐내는 4월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