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595년~673년) |
김해 김씨, 경주 김씨, 강릉 김 씨의 김해나 경주, 강릉을 본(本)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 본관이라고도 하고 본향이라고도 한다. 본(本)밑에 여러 개의 파(派)가 있어서 김해 김 씨 중에서도 여러 갈래의 파가 나뉘어 있는 것이다.
김 씨의 본관(本貫)은 "문헌비고 증보(文獻備考 增補)"에는 499본이 수록되어 있고, "성씨대관(姓氏大觀)에는 600본(本)으로 나타나 있으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623본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 씨를 크게 나누면 가락국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 계와, 경주 신라왕실의 박(박혁거세), 석(석탈해), 김(김알지)의 3성의 하나인 김알지 계열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가락국기(駕洛國記) 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기를 본래 가락국(駕洛國)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 등으로 촌장에 해당하는 아홉 간이
있어서 각각의 지방 고을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에 아홉 명의 간 들이 구지봉(龜旨峯)에 모여서, 가락국을 이끌어갈 왕을 얻고자 하늘에 기원하였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여섯 개의 큰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이 내려 왔다. 다음날 금합 속의 여섯 개 알에서 각각 동자(童子)가 태어났는데 가장 먼저 태어난 동자를 수로(首露)라 하였고 황금알에서 나왔으므로 김수로라 하며 김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삼고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가야국의 각 지방의 수장으로 삼았다.
이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계승해온 성씨가 김해 김 씨이며 김수로왕의 왕비는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공주인데 서기 48년 신라유리왕 25년에 배를 타고 가야국의 주포촌 (主浦村)이란마을에 상륙하여 입고 온 비단옷을 벗어서 산령(山靈)에 제사를 올리니 이곳을 비단고개 능현(綾峴)이라고 한다. 붉은 깃발을 꽂고 들어오던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며 공주의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라 하였으며 훗날 김수로왕과 혼인을 하여 왕비가 되었다.
김수로왕과 왕비 허왕옥 사이에서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 씨로 왕통(王統)을 이어가게 하고, 허 왕후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아들 둘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교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허 씨의 후손 중에서 허 기(許 奇)라는 사람이 신라의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갔다가 당나라 천자로부터 이씨(李氏)로 성을 하사 받아와서 이 씨로 성을 썼는데 그의 후손인 이허겸(李許謙)이 소성후(邵城侯)라는 벼슬에 봉해지면서 이허겸 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인천으로 하는 인천 허씨(仁川 許氏)가 되었다.
김해김씨는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나 김수로왕의 계열이 아닌 완전히 근원이 다른 김해김씨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대장인 가등청정(加?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일본군대 삼천 명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본명(本名)인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可)를 버리고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는데 이괄(李适)의 난(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큰 전공을 세워서 자헌대부(資憲大夫)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권율(權慄)장군으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란 이름을 하사받으니 그의 후손들은 김수로왕 계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김해 김 씨를 이루게 되었다.
본래 일본인 이었던 김충선은 1592년 임진년에 일본군이 가등청정 을 앞세워 불법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온갖 만행과 약탈을 서슴지 않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조선의 문물이 일본보다도 오히려 뛰어나고 앞선 것을 보고, 마음이 동요되어 평화롭고 고요한 동방예의지국 조선국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고,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 진(朴 晋)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박진 병마절도사의 안내로 조선에 귀의하였다.
조선에 귀의한 김충선은 일본군 장수로 우리나라에 침략해 와서 마음을 돌리고 오히려 칼날을 돌려 여러 전장에 나가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수많은 전공을 세우니 침략해온 적군의 장수가 오히려 훌륭한 우리 편의 명장이 되었으며 이런 눈부신 공로를 인정받아 도원수 권율 장군과 어사 한준겸의 요청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라는 높은 벼슬을 받은 것이다.
그 후에도 김충선 은 이순신 장군과 홍의장군 곽재우등과 토의하여 일본군의 조총(鳥銃)제조법과 화약 제조법을 우리 측 군병들에게 널리 보급하게 하였으므로 우리 군병들도 비로소 화약과 소총을 지니는 첨단 무기를 지닌 정예 군병이 되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북쪽지방의 변경에 자주 오랑캐가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자청하여 북방에 나아가서 변방의 방어임무를 십년동안이나 잘 완수하고 돌아오니 나라에서는 그 공로를 칭송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라는 벼슬을 내렸다.
1624년 인조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에는 이괄의 오른팔 격인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붙잡아 척살하였으며,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나아가라는 국가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스스로 광주 쌍령(廣州 雙嶺) 전쟁터에 달려가 오랑캐 오백여명을 베는 전공을 세웠으며 화평이 이루어지자 대구(大邱)로 돌아가서 살았다.
사야가(沙也可) 라는 이름의 일본군 병사였던 김충선(金忠善)의 성씨를 김 씨로 한 것은 일본이름의 사(沙)자가 "모래 사"자인데 모래는 금모래 사금(沙金)이 으뜸이기에 김(金)씨로 사성(賜姓)한 것이며 사성이란 성씨를 하사한 것이다.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한 것은 금(金)중에는 해중금(海中金)이 으뜸이라서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하도록 사관(賜貫)하였는데 사관은 본관을 하사한 것이며, 해중금(海中金)은 육십갑자
중에서 첫 시작인 갑자(甲子), 을축(乙丑)을 납음 오행으로 해중금(海中金)이라 한다.
김충선(金忠善)사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하였으며 남긴 저서로는 "가훈(家訓)"과 "향약(鄕約)" "모하당집(慕夏堂集)" 이 간행되었다. 이름처럼 국가에 충성하였으며 바르게 선하게 산 우리 역사속의 인물이며 그 후손들은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해김씨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김해 김 씨는 김수로왕의 후손과 김충선 후손이 있으며, 허씨(許氏)도 김수로왕의 아들인데 어머니성씨로 모계(母系)를 이은 것이고 가락국(駕洛國)은 금관국(金官國)으로 금관군(金官郡), 금관소경, 임해현, 금주목, 금녕부 에서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로 불렀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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