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이 청산리에서 싸웠고, 윤봉길 의사가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이들 외에도 충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이젠 이들의 정신과 혼을 계승하고, 오늘의 희망으로 삼을 때다. 이를 위해 중도일보는 '그날의 함성, 오늘의 희망으로'라는 시리즈로, 풀어야 할 과제를 진단한다. <편집자주>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아우내 봉화축제' 모습. /사진=천안시청 홈페이지 갈무리 |
①분연히 일어난 충청의 우국충정
②열악한 지역 3·1운동 고증 실태
③홍보에만 사용되는 열사들의 삶
④보여주기식 기념사업 이젠 그만
⑤자주독립정신 충청굴기 혼으로
①분연히 일어난 충청의 우국충정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은 뜨거웠다. 천안 아우내장터는 피끓는 외침으로 가득 찼다. 성별도, 신분도, 지역도 상관없었다. 모두 하나 돼 목이 터져라, 땅이 꺼져라 외쳤다. 선조들의 피와 땀, 눈물이 배긴 그 외침. "대한독립만세."
1919년 그날은 그랬다. 온 겨레가 하나 돼 '대한독립'을 외치고, 부르짖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우린 3·1 운동이라 부른다. 이때 충청은 앞장서 우국충정을 불살랐다. 일제의 침탈과 강점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다.
그 시작은 유관순 열사였다. 유 열사는 17살의 나이로 만세운동에 나섰다. 서울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유 열사는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내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해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장터는 태극기 물결로 휩싸였다.
유 열사와 군중 3000명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일제의 총칼에 19명이 순국했고, 유 열사를 포함한 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 열사는 끌려간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1920년 9월 유 열사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했다. 하지만 그와 아우내장터 군중들의 자주독립정신은 충청이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우뚝서는 모멘텀이 되기에 충분했다. 예산 출신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일제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이 폭탄에 상하이 거류민단장(가와바타 테이지)이 죽었고, 상하이 파견군 육군대장(시라카와 요시노리)과 주중 일본공사(시게미츠 마모루), 총영사(무라이 쿠라마츠)가 중상을 입었다. 육군대장은 이후 상처가 악화돼 죽었다.
홍성 출신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첩을 거뒀다. 홍성이 고향인 만해 한용운 선생도 한평생을 민죽운동과 조국독립에 바쳤다. 이들을 포함한 충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렇담 이들의 혼과 정신은 제대로 계승됐을까. 걸맞은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지역 역사학자와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유관순 열사만 해도 그렇다. 유 열사는 독립운동 5개 서훈 중 3등급이다.
때문에 유 열사의 공적과 상징성에 걸맞지 않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서훈 등급이 낮아 유 열사 추모제에 대통령 화환이 오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뉴욕주의회가 올 3월 1일을 '유관순의 날'로 지정한 것과 대조적이다.
대표적인 인물만 부각·홍보하는 보훈 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다. 지역 독립운동이 대표 인물로만 상징화돼 다른 의사들의 삶이 조명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달 현재 국가보훈처엔 충청 출신 독립유공자로 1758명이 등록돼 있다.
사적지 관리와 기초 조사도 부실하다. 1919년 대전·충남에선 100여건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39곳만 공식 사적지로 분류돼 있다. 예산이나 지원 사업 또한 지속적이지 않아 연구환경도 불안정하다.
그럼 앞으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지역 내 3·1 운동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인물들의 재조명이 우선되고, 이를 기념하고 계승할 사업을 발굴·추진해야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선흥 광복회 대전시지부장의 말이다.
"대전과 충청의 3·1 운동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연구와 정신 계승은 단순,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100년 뒤에도 기념·계승할 제도와 사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에게도 피부에 와닿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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