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혜진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자신의 외모와 나이를 들먹이며 함부로 능력을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술기운을 빌어 '니킥'을 날리던 영애씨의 모습이 내가 겪은 일인양 여전히 생생한 건, '기분 탓'이 아니라 '동지애'에 가까운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다소 '막돼먹은 영애씨'가 요즘은 엄마가 되어 직장으로 돌아와, '워킹맘'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고, 결정적으로 월급도 없다!"며 모든 엄마의 한탄을 모아 시원하게 일갈하더니, 직장으로 돌아온 첫날 느낀 "빈 시간만큼의 소외감과 서글픔"을 덤덤하게 보여줘 일하는 엄마들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애가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젖을 달라고 운다는 것도 몰랐고, 하루에 기저귀 열댓 번씩 갈아 줘야 한다는 것도 몰랐던’ 영애 씨는, 겪으면서 비로소 알게 된 고충을 양분 삼아 '타인의 고통에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어른으로 다시 성장하는 중이다. '다 겪어봐야 안다'는 우리 할머니 말씀을 학자들은 이렇게 풀어내기도 했다.
뉴욕 대학의 유혜영 교수는 작년 한 시사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딸을 뒀다는 개인적 경험이 정치인의 의정활동이나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들을 소개했다.
미국 하원의원들의 투표행태와 그들이 딸을 두었는지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딸을 둔 의원들이 그렇지 않은 의원들보다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한 법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했음이 드러났다. 딸을 키운 개인적 경험이 여성 고유의 차별적 경험과 이슈를 이해하고 정책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딸은 판사들의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유혜영 교수는 설명했다. 딸을 가진 판사들이 성희롱 등 여성 권익과 관련한 사례에서 여성에게 더 유리한 판결을 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러한 '딸 영향력'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판사와 남자 판사들에게서만 나타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래 진보적이거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판사, 여자 판사들은 딸이 있든 없든 여성과 관련한 판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판사에게 '공감'을 기대하는 것이 공정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이 주는 다양함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내리는 판결 또한 공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린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 삶의 다양함,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고통과 갈등은 법전에 있는 글자들만으로는 충분히 표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같이 회의하다가도 갑자기 유축하러 화장실로 뛰어가야 하는 워킹맘의 뒷모습을 바라본 사람은 그녀의 분주함에 뒤섞인 미안함도 알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룰'이 공정하다고 믿어왔었는데, 딸을 키워보니 내 딸이 세상에서 겪은(을) 일에 대해, 그리고 믿어왔던 세상의 '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이 계속, 많이 나와야 한다.
함께 겪어봐야 이해할 수 있다. 내 옆에 영애 씨도 있고, 영애 씨의 직장 복귀를 응원하기 위해 회사에서 '1호로 육아휴직을 한 남성'이 돼버린 승준 씨도 있고, 딸을 키우느라 한 번도 안 해본 고민을 하는 부장님도 있어야 한다.
이미 여성들이 '충분히' 사회에 진출해 '충분히' 제 몫을 챙겨가고 있다는 주장이 종종 들린다. 하지만 진짜 충분한지는 직접, 함께 겪어봐야 알 수 있다. 더 많은 영애 씨와 승준 씨, '딸바보' 아빠가 우리 옆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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