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시절 고(故) 전봉건 스승님과 십수년을 동행하며 탐석(수석수집)할 때 스승님의 돌짐과 나의 돌짐을 합쳐지고서도 끄떡없이 비탈길을 오르내렸건만 이젠 맨몸으로 걷기도 힘에 겨우니 아무리 천하장사라 한들 늙고 병 들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수석(壽石)에 조예가 깊으신 고(故) 전봉건 스승님과 동행하여 남한강 일대의 돌밭을 누비며 탐석할 때가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봅니다.
이른 새벽 서울 마장동 버스터미널에서 충주행 버스를 타고 다시 택시를 불러서 목벌이나 목계 한수리나 포탄리,청풍,수산,도화리,지곡리,앙성,서창,여주,보통리,이포리,개군면,양평,미사리까지 남한강 일대의 돌밭이란 돌밭을 헤메고 떠돌던 세월이 반세기가 넘어섰으니 무상한 세월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요?
전봉건 스승님과의 돌밭에서 돌을 고르고 선택하는 탐석과 정은 시(時)쓰기의 학습과 수행(修行)의 과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돌밭으로 향하는 당시의 일상은 스님이 좌선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탐석에 임해야 했고 한 점의 돌에게도 소중히 여겨 사물인식을 차원 높이 인식하도록 묵언으로 가르쳐 주셨지요 그러다 보니 문학정신이 수행과 득도의 수신하는 태도로 바꿔지게 되었답니다.
"돌은 줍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 이니라/ 돌을 찾고 또 찾는 일은/ 눈뜨기 위한 고행 이니라// 돌은 강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밭에 있느리라//.......이하 생략
이윽고 거머쥔 돌 하나/ 그 돌이 시 이니라/ 시가 곧 돌이니라/ 그것 모두가 고행이니라// 졸시 전봉건(돌 찾기)2에서 수석과 돌, 탐석과 시(時)쓰기란 예수나 석가 같은 구도자적인 경지에서 끝없이 정진하기를 제자에게 들려주시는 스승의 지고한 정성을 깨닫게 되었지요
충주댐건설 이전인 70년대만 하더라도 돌을 줏으러 다닌다(탐석)고 하면 일반 사람들은 미친 사람으로 여겼지만 수석애호가들은 골동품 수집하듯 정성껏 수집하고 감상하여 한때 각광을 받았던 취미생활이 되기도 했지요. 고(故) 박두진 시인,나의 스승이신 전봉건 시인, 정대구,이건선,임보,서정춘,권달웅,유재영,김상묵,김현,김선배,최선근,김춘식 시인 등 많은 시인들이 탐석을 했었습니다.
"나는 징 이어요/ 징 소리 이어요/ 강하게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모래벌판 바람을 사위고/ 되돌아 오는 울음 이어요/ 나는 청보리 이어요/ 눈비 오는 겨울날/ 푸른 칼날을 들고/ 일어서는/ 청보리 이어요......이하 생략
오 불덩어리로 침묵하는 돌이/ 언제 다시 꽃으로 필까// 졸시 "꿈꾸는 돌"에서 돌밭 가던 길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내 머리 속엔 남한강 강변마을 입구마다 청보리 밭이 바람에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키 크신 전봉건 스승님이 먼 하늘을 응시하시며 떠 오른 종다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하늘 높이에서 종다리 한 마리가 한 점의 불꽃으로 타오를 때 시인의 가슴에선 치열한 시심이 솟구쳐 한 줄의 기막힌 시로 탄생합니다.
"보리밭/ 한 정보가 떠오른다// 하늘은 눈물 빛이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그 종다리// 전봉건 시인의 "종다리"에서
" 하늘 속 깊이 뜬/ 종다리는/ 검은 한 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실 그 검은 한 점은 종다리가 아니다// 하늘 속 깊이 뜬 검은 그 한 점 속에서 타는 불// 보이지 않는 그 불이 종달 이다// 전봉건 시인의 "불"에서 당시 문제작으로 높이 평가되었던 작품입니다.
5월의 남한강 강변 청보리 밭과 하늘 높이 떠서 치열하게 노래했던 종다리를 떠올려 봅니다.
천상의 세계에서 아직도 돌밭을 서성이고 계실 전봉건 스승님을 푸른 5월의 하늘에 우러러 봅니다.
노수빈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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