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일상에서 벗어나 국화를 즐겨 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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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일상에서 벗어나 국화를 즐겨 봄이 어떨까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 승인 2020-11-02 10:33
  • 신문게재 2020-11-03 19면
  • 김소희 기자김소희 기자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이백(李白)이 놀던 밝은 달도 있고 두목(杜牧)이 봄철 꽃보다 더 붉다고 읊은 서리 맞은 붉은 단풍도 있다. 이런 풍광(風光)은 매우 아름다워서 한때 우리의 감흥을 돋우고 눈을 즐겁게는 하지만 사방에 드리워진 황량하고 쓸쓸한 기운을 어쩌지는 못한다. 국화는 이런 기운을 딛고 일어서는 고결한 자품과 맑은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 향기와 자태는 시든 풀 섶 차가운 된서리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선비들이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국화를 사군자 중 하나로 꼽은 이유이다.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

국화의 고상한 기품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반추하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지친 삶을 위로해주고 잠시나마 속된 생각을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나라 선비들도 국화를 무척 사랑하고 다양한 시문을 남겼다. 이규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인들의 작품은 국화를 통해 어떤 풍류의 삶을 즐겼는지 말해준다. 그 중에 신용개(申用漑)는 국화를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때 활동한 문인으로 호탕하면서 탁월한 지조가 있었다. 정광필(鄭光弼)과는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 어느 날 중종이 친구가 있느냐고 묻자 정광필은 신용개 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 뒤에 중종은 신용개에게 똑같이 물었다. 신용개도 정광필이라고 대답하니 중종은 지기(知己)의 벗이라고 인정했다. 신용개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많은 젊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정광필은 사화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신용개가 세상에 없음을 한탄했다. 당시 사람들도 신용개만 있었다면 사화를 막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던 인물이다.

신용개는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늙은 여자종을 불러 서로 큰 잔으로 쓰러질 정도로 마셨다. 그는 평소에 여덟 동이의 국화를 길렀다. 가을이 되어 국화가 활짝 피자 대청에 가득 찰 정도였다. 국화 향기를 무척 좋아한 그는 매일 감상하며 즐겼다. 어느 날 집안 식구들에게 오늘 좋은 손님 여덟 분이 올 것이니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식구들이 술상을 다 준비했는데도 저녁이 되도록 손님은 오지 않았다. 결국 식구들이 술상을 이미 준비해 놓았다고 여쭙자 신용개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동산에 둥근달이 떠올랐다. 달빛이 대청 안에 비추자 국화꽃은 향기와 함께 더욱 난만하게 빛을 발하였다. 신용개는 그제야 술상을 내오라고 시켰다. 그는 식구들에게 여덟 동이의 국화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나의 좋은 손님이다"라고 했다. 국화 앞에 좋은 안주와 술을 차려놓고는 "내가 은도배(銀桃杯)에 술을 따르리라"며 했다. 은도배는 천도복숭아를 반으로 나눈 모양의 은잔이다. 각각 두 잔씩 국화에게 따라 주고는 자신도 술에 취해 누웠다.

벗들과 국화를 감상하며 술 마신 문인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밝은 달빛 아래 국화를 벗 삼아 술을 수작한 사람은 신용개 밖에 없다. 달과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독작한 이백도 국화를 벗 삼아 마시지는 않았다. 국화를 무척 좋아했던 도연명도 달빛아래서 국화와 대작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신용개는 달과 국화와 함께 술을 마셨으니 그야말로 진정으로 국화의 운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벌써 1년이 되도록 코로나의 대유행으로 지친 사람들은 우울해 하고 불안에 떨고 있다. 경제적으로 심각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나 삶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지는 암울한 현실이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게 중요했던 일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듯이 괜한 일에 소중한 인생을 허비한 경우가 많다. 사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느긋하게 삶을 반추해보는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국화가 한창 무르익는 시기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곳곳에 국화가 피어있다. 특히 유성 천변 거리와 공원에는 온갖 종류의 국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는 보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때때로 일상에서 벗어나서 고인(古人)의 풍류를 생각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국화를 즐겨 봄이 어떨까.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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