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여행의 실천]"셋이 가리키면 그곳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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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여행의 실천]"셋이 가리키면 그곳을 본다"

3·4 완주코스 : 중문관광단지부터 제주공항까지…'머털도사' 문용포 인터뷰

  • 승인 2009-11-26 10:07
'공정여행(fair travel)'이란 이름으로 제주 땅을 밟은 지 어느덧 나흘째를 맞았다. 첫날 빗속에서 달린 제주여객터미널에서 중엄리까지를 제외하면 사실상 오늘(지난 3일)로 자전거를 이용한 제주일주가 끝이 난다.

첫째날 일도동에서 표선리, 둘째날 표선리에서 중문관광단지, 그리고 오늘 목표코스는 중문관광단지에서 다시 중엄리까지다. 두어 시간만 더 달리면 제주공항까지 갈 수 있지만,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린 여행의 아쉬움을 다독이려 부러 짧은 여정을 남겨둔다.

가야할 여정이 그제와 어제 만큼 남아 있지만, 마지막이란 생각이 페달질을 더디게 하는 아침, 오늘 여정에선 또 어떤 추억이 쌓일까...... 자, 출발!

전날 표선리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의 여정이 힘겨웠던 건 제주도 지형이 남고북저, 동저서고의 형태를 띄고 있어 유독 업힐 구간이 많아서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간다. 이러한 길을 '공짜길'이라 이름 붙였다. 힘들이지 않고 그저 달릴 수 있기 때문. 게다가 아무리 평일 오전이라지만 도로에 차 한 대 없다.

마치 우리를 위해 열어놓은 듯한 길을 거침없이 달려나가자 어느새 눈앞에 산방산이 보였다.

옥황상제가 집어던진 한라산의 봉우리라는 산방산은 실제로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 모양과 암석의 질 등이 유사하다고 한다. 산방산 둘레를 따라 이어지는 일주도로 옆으로 용머리해안과 형제섬이 솟은 바다가 펼쳐지고, 풀숲 한가운데 낮잠을 즐기는 갈색 새끼마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미인 듯한 백마 한 마리가 운치를 더했다.

황홀한 절경에 취해 힘들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산방산 앞에 도착. 입구에 있는 사찰을 지나 해발 200미터 높이에 있는 산방굴사에 올라갔다. 이 곳은 길이 10m, 높이 5m, 너비 5m의 천연석굴로, 굴 안에 조성된 가파른 계단 끝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3년 전, 서귀포시 전체가 정전이 되고, 바다가 누렇게 뒤집힐 정도로 거센 폭풍이 당도하기 직전, 어두워지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둘러봐야 한다는 일념 하에 이 곳에 올랐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사람 한 명 없었고, 마치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절벽 안에서 낯선 여행자를 응시하는 불상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 채 몇 분을 못 견디고 발걸음을 옮겼더랬다. 그러나 다시 만난 불상은 마치 "여행이 즐겁냐" 물어보듯 다정한 표정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서서 남은 여정의 안전과 떨어져있는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한번 다녀갔던 곳이라 자전거로 달리며 보는 익숙한 풍경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푸근하다. 지도상의 거리로 보면 전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경사 구간이 없어 속력은 배로 빨라졌다. 그간 지겹게 달린 해안도로인데 왠지 눈에 담는 한곳한곳이 다 특별하게 느껴진다. '내일이면 돌아가는구나......'

곧 이어서 멈춘 곳은 송악산. 전날 거쳐온 외돌개와 함께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패키지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인 만큼 해변 입구엔 '장금이' 이영애 씨의 사진이 담긴 큰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송악산 해안절벽에 1미터 간격으로 뻥뻥 뚫려 있는 구멍의 정체는 미리 알고 오지 않은 이상 지나치기 십상이다.

저 역시 일본군이 뚫어놓은 진지동굴로, 미군에 맞서 제주도 전체를 폭파시키려던 일본의 자살폭탄 전술의 흔적들이다. 어느 순진하고 모험심 많은 외국인 여행객이 저 동굴 안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제주 해변에는 바다 경관을 즐기며 야영하기 좋은 자연동굴들이 많다"는 후기를 적기 전에, 이곳에 지난날 역사를 알리는 친절한 안내판이 세워지길 바란다.

해안도로와 일주도로가 만나는 동일리에서 초콜릿박물관 이정표를 발견했다. 왠지 '헨젤과 그레텔'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초콜릿 성이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 일었으나 내륙으로 들어가기 보단 해안도로를 더 달리고 싶어 이번 여정에선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다음 목표지는 차귀도. 슬슬 배가 고파왔지만 참기로 했다. 차귀도로 가는 주변 풍경은 몇 해 전 들른 몽골의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까지 달려온 제주의 모습과는 달리, 태양 아래 이글거리는 드넓은 평야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었다.

평온한 푸른빛이 감도는 대지를 보며 완만한 해안도로를 2시간 정도 달렸을 때, 배를 타면 1-2분이면 닿을 거리에 와도와 차귀도가 보이는 고산리에 당도했다. 길가 한 켠에 부지런히 한치를 널고 있던 할아버지가 "엇, 오징어다!" 외치는 무지한 여행자를 웃으며 반기신다.

오늘 점심메뉴는 한치회덮밥.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마치 정원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풍성하고 곱게 키워낸 화분들에 감탄해, 분명 음식을 만드는 손길도 정갈하고 깊을 것이란 신뢰가 갔다.

좀전까지 바다서 뛰놀았을 한치의 싱싱한 살과 따뜻한 밥이 매콤한 초장과 함께 버물여지면서 맛은 그야말로 환상, 특히 식사가 나오기 전과 중간에 각각 공수된, 갓 익혀낸 바삭한 감자튀김과 살 두툼한 오징어 튀김이 아직 갈길 먼 여행자의 뱃속을 더없이 든든하게 해주었다.

입가심으로 얼음과자 하나씩 물고 그늘에 앉았다. 시간은 오후 1시 30분. 본격적으로 뜨거워질 때다. 더위를 좀 피했다 갈까 싶었지만, 그냥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오늘은 기필코 해수욕을 하기 위해서!

평야지대가 끝이 나고, 차귀도의 뒤통수가 막 가려질 때쯤 항구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하얗고 아담한 성당 건물이 눈에 띄었다. 산방산에선 부처께 인사를 드렸으니 가톨릭교에 대한 예도 갖추고 싶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성당 바로 우측에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표착기념관이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4월 서품을 받기 위해 제물포에서 상해로 떠났다가, 그로부터 5개월 후인 9월, 13명의 천주교도와 입국을 시도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했다고 한다. 그때 타고온 라파엘호가 복원되어 기념관 오른편에 서 있다.

이 젊은 신부는 그 다음해 동료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통로를 알아보다 체포되었고, 신앙의 뜻을 널리 펼쳐보기도 전에 25세란 젊은 나이로 참수되었다.

무조건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조차도, 그 선의 조건이 '같음'에서 '유일'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이 생명을 탄압하는 정당함이 될 수 있을까. 인류 이래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종교간 대립을, 정작 그들이 믿는다는 '신'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오후 2시를 넘긴 시각. 정말이지 그늘이라곤 없는 해변도로 위에서 온몸으로 받아내는 태양의 열기가 만만치 않다. 달릴 땐 바람이 그나마 도와주지만, 자전거에서 내려서면 엄청난 지열에 금세 숨이 컥 막힌다. 물통의 물은 벌써 열 번 가까이 비웠다.

선인장자생지 월령마을을 지나면서 드디어 협재와 능곡, 곽지해수욕장이 지척임을 알리는 이정표들이 보였다. 앞서가던 일행이 바짝 속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힘껏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협재해수욕장을 가려 했으나, 먼저 만난 것이 금능해수욕장. 어딘가가 중요치 않다. 일단 거금 1만 원에 튜브를 빌리고, 대여소 직원에 자전거와 베낭까지 몽땅 맡긴 뒤, 수영복이 없는 대신 여분의 반바지와 면티를 갈아입고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어, 물이 무릎까지밖에 안 온다. 세 살쯤 돼 보이는 꼬마도 아빠 손을 놓고 혼자서 잘 논다. 금능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물이 맑아 온가족 피서지로 제격이며, 특이한 것은 얕은 수심이 이어지다 수 미터 앞에 다시 모래언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바다 중간에 사람들이 떠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신나게 해수욕을 즐기고, 튜브에 누워 하늘빛, 바닷빛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지금껏 달려온 여정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눈을 감으면 제주 곳곳의 그 푸르던 길들이 더욱 선명하게 펼쳐졌다.

두 시간쯤 해수욕을 즐기고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젖은 옷가지들은 샤워할 때 빨아 자전거 뒤 배낭 위에 펼쳐 널었다. 덜 마른 빨래를 건조시키는 최상의 방법이다. 어느덧 해의 기운이 주춤해지고, 바람도 한층 선선해져 있었다. 애월까지 불과 4km, 제주시내까지 24km가 남은 지점에서 한 무리의 도보순례단을 만났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서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 학생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정여행을 준비하면서, 필리핀 보홀에서 관광객들을 눈요기를 위해 고통받고 있는 야행성 안경원숭이 타쉬에르들을 위해 포퍼먼스 공연을 펼쳤다는 제천 간디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은 터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학생들은 올해 입시를 치룰 고등학교 3학년들로, 여느 도시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시간과 공간에서 극기를 체험하고 있었다. 제일 뒷대열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선생님 한 분께 여정의 의미를 물었다. 갑갑한 교실 대신 자연 속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는 정기적인 국토순례라고 했다. 검게 탄 아이들의 얼굴에선 자신감과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한창 떨어져 걸어오던 장난꾸러기 같은 제자 2명이 선생님께 달려들며 기꺼이 기념촬영을 허락해주었다.

건강한 교육현장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을 본 것 같아 그들을 보내고 돌아서는 마음이 흡족해졌다.

여행이 매력적인 건 이렇듯 예기치 않게 길 위에서 만나는 좋은 인연들 때문이기도 하다. 여정의 피날레를 장식하듯 새로운 만남은 곧바로 또 이어졌다. 이번엔 제주에 당일 도착한 자전거동호회 사람들이었다. 순간 느껴지는 깊은 동질감. 이제 막 제주일주를 시작한 그들에게 반가운 인사 외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제주의 모든 길을 보게 될 것이며, 분명 깊이 감동할 것이기 자명하기 때문이다.

앗! 어느덧 첫날 라이딩 종착지였던 중엄리 전망대에 도착했다. 나흘 만에 다시 보는 친숙한 풍경. 이 뿌듯함과 아쉬움으로 범벅된 마음을 뭐라 설명할까......

이로써 4박5일간의 제주일주는 사실상 끝이 났다. 숙소는 일몰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해안도로가 작은 민박집을 예약했다. 마당에 나무의자와 테이블이 갖춰져 있어 밤새 파도소리를 들으며 여행의 마지막 밤을 지새울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매력이다.

이제 잠시 후 보게 될 제주 '머털도사'와의 만남과, 함께 땀흘리며 길을 달려온 일행들과의 뒤풀이만이 남아 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이번 여행의 주제곡이 된 '제주도 푸른밤'을 흥얼거리며 짐을 푼다. [노컷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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