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살아가는 경험으로 되어가는 우리들

  • 오피니언
  • 프리즘

[프리즘] 살아가는 경험으로 되어가는 우리들

  • 승인 2017-05-30 18:01
  • 신문게재 2017-05-31 23면
  • 임숙빈 을지대학교 간호대학장임숙빈 을지대학교 간호대학장
▲ 임숙빈 을지대학교 간호대학장
▲ 임숙빈 을지대학교 간호대학장
아직 학기중인데 불가피하게 떠나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필자가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 방법과 관련해 꼭 참석해야할 웍샵이 있기 때문이다. 일년 중 꼭 이 때만 웍샵이 개최되는 바람에 몇년을 벼르기만 하다가 새롭게 익혀야할 변동 사항까지 생겼기에 더는 미룰 수 없어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광도 아니고 마지막 순간까지 업무를 보다가 나서는 일정이기에 마음만큼은 가능한 헐렁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며칠간 입을 옷가지와 웍샵에 필요한 책자 등 자료를 챙겨 짐을 부치고 나서, 아무 것도 사지 않으니까 들고 다니는 것은 달랑 핸드백 하나이다. 아,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던 단촐한 차림의 나그네, 짐에 치이지 않는 여행객이 된 것이다. 되어보니 여유롭기 이를데 없다. 힘쓰지 않아서 좋고, 신경쓸 게 확 줄어드니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목적지인 미국의 피츠버그까지는 직항 노선이 없기 때문에, 중간에 갈아타면서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해 17시간 정도 걸리는 긴 여정이었지만 짐이 없다보니 그래도 견딜만했다.

머무를 호텔을 찾으면서 위성 지도를 몇 차례 보아서 그런지 늦은 시각에 도착한 낯선 도시이지만 생경하지 않은 느낌이다. 왕년에 잘 나가는(?) 철강 도시였다는 피츠버그는 조용하고 비교적 안전하다고들 말한다. 검색해보니 엘러게니강과 모논가힐라강이 합해지면서 오하이오강을 이루는 삼각주에 위치해서 이 도시에는 다리가 무려 446개나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리 많은 도시의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으려나 싶어 다리만 건너면 웍샵 장소까지 걸어갈 수 있는 강의 북쪽 지역에 호텔을 잡았다.

시차로 인해 뒤바뀐 아침, 눈을 뜬 지금은 대여섯 시간 차를 달려 필자를 만나러 오고있는 제자를 기다리고 있다. 넓디 넓은 미국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다닌다고 하지만 혼자 그렇게 긴 시간 운전하는 것이 결코 보통 일은 아니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걱정을 부추기는데 창밖을 살피다보니 엊그제 면담했던 학생 얼굴이 떠올랐다.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는 것이다. 이미 중반까지 다녔고 뭐 딱히 다른 공부를 하려고 결정한 것도 없다는 말에 너무 힘들면 휴학을 하고 더 생각하면서 에너지를 추스르라고 권하자 결심이 약해질까봐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지도교수와 면담을 하고, 학과장을 거쳐 급기야 필자까지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나누었지만 꼭 다문 입매가 이미 닫혀버린 마음을 드러내기에 아쉬움을 전하며 대화를 끝냈다.

지금 오고 있는 제자가 15년 전에 그랬다. 간호사가 자신에게 맞지 않을 것 같아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간호사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얼마남지 않은 졸업을 챙기자고 했다. 그렇게 한 묶음 마치는 것이 마음을 더 가볍게 하고 실패의 느낌도 덜기 때문에 권유했는데 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제자는 졸업을 했을 뿐만아니라 미국까지 와서 간호를 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나누기 위해 몇시간의 운전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는 것을 보면 자유 의지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뭔가 답답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 때 사실 우리는 그 시간이 한없이 이어질까봐 두렵다. 그 런 상태가 한없이 이어질까봐 그 순간을 벗어나려 서두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누가 단정하여 예측할 수 있겠는가? 좀 더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말에 학생은 그 동안 충분히 생각했다고 잘라 말했다. 입학 후 몇년을 갈등을 품은 채 다녔다는 이야기인데 누구라도 좋으니 일찌감치 속내를 털어놓았더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으면서 학생의 고민을 미리 알아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그리고 몇년의 시간을 혼란과 갈등으로 대충 보냈을 생각을 하니 그 경험이 아쉽기만 했다. 교수들이 학생들과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적어진 요즈음은 정기적인 상담이야 하지만 연구 실적에 매이고, 평가니 보고서니 서류작업에 내몰리다보니 학생들이 선뜻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발견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의 영향으로 부자연스러운 일도 불편한 일도 부쩍 늘었다. 어디 외부 강의 하나를 가더라도 추가 서류를 작성해야 하니 부족한 시간은 더 부족해졌고 학생들과 비공식적인 만남을 가지려해도 직무관련성이니 뭐니 생각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덧붙었다, 맑은 사회 구현을 위해 법 제정도 정확한 실천도 필요하겠지만 내용을 섬세하게 손봐서 교육의 본질이나 목표에 걸림돌이 되지 않고 교육적인 문화도 파괴하지 않도록 개선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하간 우리네 삶은 경험의 퇴적인데 그 기회를 제대로 돕지 못한 것 같아서 영 마음이 찜찜하다. 올 여름 이 학생의 경험은 그녀에게 무엇이 되어 남을까? 대화했으나 소통하지 못한경험은 필자에게 또 어떤 의미를 보탤까? 선생님을 보려고 대여섯시간 장거리 운전을 하는 제자의 경험은 또 어떤 의미의 되어감으로 그녀의 삶에 더해질까?

오월, 온 누리에 퍼지는 생명력에 그대도 잘 있을거란 생각만으로 충분한 그리움이 된다는 김은식님의 시와 함께 되내는 ‘인간 되어감’ 이다.

임숙빈 을지대학교 간호대학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논산 탑정호, 500실 규모 콘도미니엄 현실화 '청신호'
  2. [총선리포트] 양승조·강승규, 선거유세 첫날 '예산역전시장' 격돌한다
  3. 한 총리, '의료 현장' 수습 총력… 충남대병원과 간담회
  4. KAIST 물리학과 채동주 씨 "걱정 없이 과학기술 연구할 수 있는 세상, 가장 쉽고 빠른 방법 투표"
  5. 내년 폐쇄 들어가는데…충남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은 어디로?
  1. 에너지연 신동지구에 '태양광기업공동활용연구센터' 준공
  2. [중도일보 독자권익위원회] 4·10 총선 지역밀착형 기사 발굴 호평… 웹 접근 편의성 강화 필요성 지적도
  3. [대전 다문화]대전시가족센터서 ‘다문화 어린이 학습지원 사업 설명회’
  4. 美 프레스비테리안 대학 넬슨교수 한남대 총장 예방
  5. [대전 다문화]대덕구 여성단체협의회, ‘전통 장 담그기’ 개최

헤드라인 뉴스


[이슈현장] 고밀도 도시개발 이룬 유성… 온천관광특구 고유성은 쇠락

[이슈현장] 고밀도 도시개발 이룬 유성… 온천관광특구 고유성은 쇠락

대전유성호텔이 이달 말 운영을 마치고 오랜 휴면기에 돌입한다. 1966년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연 유성호텔은 식도락가에게는 고급 뷔페식당으로, 지금의 중년에게는 가수 조용필이 무대에 오르던 클럽으로 그리고 온천수 야외풀장에서 놀며 멀리 계룡산을 바라보던 동심을 기억하는 이도 있다. 유성호텔의 영업종료를 계기로 유성온천에 대한 재발견과 보존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유성온천의 역사를 어디에서 발원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주> ▲온천지구 고유성 사라진 유성 대전 유성 온천지구는 고밀도 도시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뤄지..

대전시 재산 공개 대상자 평균 재산은 13억 5000여만원
대전시 재산 공개 대상자 평균 재산은 13억 5000여만원

대전시장 등 대전시 재산 공개 대상자의 평균 신고 재산은 13억 4822만원으로 조사됐다. 대전시는 2024년도 정기 재산 공개 대상자 97명에 대한 재산 변동 내역을 28일 관보 및 공보에 공개했다. 이 중 정부 공개 대상자는 29명, 대전시 공개 대상자는 68명이다. 재산이 증가한 공직자는 62명, 감소한 공직자는 35명으로 분석됐다. 재산 총액 기준 재산 공개 대상자의 71.1%(69명)가 10억 원 미만의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재산변동 사항을 보면 재산증가액 5000만 원 미만이 31.9%(31명)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

진격의 한화이글스… 안방 첫 경기 승리 기대
진격의 한화이글스… 안방 첫 경기 승리 기대

한화이글스가 시즌 초반부터 승승장구하면서 29일 예정된 대전 홈 개막전에 대한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돌아온 괴물' 류현진이 안방에서 팬들에게 화끈한 선물을 선사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한화는 올 시즌 첫 개막전에서 LG트윈스에 패배하며 아쉬움을 남겼지만, 27일까지 3경기 연속 연승가도를 달리며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탄탄해진 선발진이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선발부터 흔들리며 이기던 경기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한화이지만, 올해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경기력으로 입증하고 있다. 펠릭스 페냐는..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제22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 돌입…표심잡기 나선 선거 운동원들 제22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 돌입…표심잡기 나선 선거 운동원들

  • 중구청장 재선거도 치러지는 대전 중구…표심의 행방은? 중구청장 재선거도 치러지는 대전 중구…표심의 행방은?

  • ‘우중 선거운동’ ‘우중 선거운동’

  • 대전과 세종에서 합동 출정식 갖는 충청지역 후보들 대전과 세종에서 합동 출정식 갖는 충청지역 후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