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세종시는 왜 ‘조애중’을 기억하지 않는가?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세종시는 왜 ‘조애중’을 기억하지 않는가?

최병조 세종교육회의 공동대표

  • 승인 2026-01-19 16:49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KakaoTalk_20260119_100126671
최병조 공동대표.
세종에는 조선시대의 한글 일기가 있다. 그것도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온몸으로 겪은 한 여성의 기록이다. 난리를 피해 가족의 손을 잡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며, 전쟁의 공포와 생존의 책임, 그리고 상실의 고통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기록이다. 그러나 이 일기는 오늘날 세종시에서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다. 한글 도시를 표방하는 세종시의 현재 풍경 속에서, 이 한글 일기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산이 되어 있다.

오늘날 '병자일기'로 불리는 이 기록은 조선 인조 시기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의 부인, 조애중(1574~1645)이 병자호란을 겪으며 남긴 한글 일기이다. 표제는 '숭정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로 명확하고, 작가 역시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기록은 여전히 '남평 조씨의 병자일기'로 불린다. 이름이 있는 작가가 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이름은 지워지고 성씨와 본관만 남은 명명 관행이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적 기준에서 본다면 이 일기는 '조애중의 병자년 일기'라 불려야 마땅하다. 조애중은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었다. 병자호란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가족 100여 명의 생존을 책임졌고, 피난과 정착, 생계와 제사를 감당한 사실상의 가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여성의 시선으로 전쟁과 일상을 기록한 작가였다. 성 평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작가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도리이며, 최소한의 예의다.

오늘날 전하는 병자일기는 원본이 아니라 후손에 의해 재편집된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6대손 남필복이 이를 정리해 소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재편집 여부와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이 있다. 원작자는 조애중이며, 그 기록은 한글로 쓰였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한글 산문 기록이 극히 드문 상황에서, 병자일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독보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문화유산을 보관했던 곳 또한 세종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전, 병자일기를 소장해 온 남산영당과 종가가 있던 공주시 공암면 성강리는 세종시로 편입되었다. 이후 2012년 12월 31일, 병자일기는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실물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의 보존처리를 거쳐 국립공주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정 이후 세종시는 무엇을 했는가. 한글 도시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도시 안에 존재하는 조선시대 한글 기록을 도시의 서사로 끌어오지 못하고 있다. 세종여성프라자는 2025년 달력을 세종의 여성 인물로 구성하며 조애중을 그중 한 인물로 소개했다. 성 평등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단체들 역시 병자일기를 세종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바라본다. 세종임금의 애민정신이 담긴 한글로 기록되었고, 조애중의 삶은 그 시대 여성 가장으로서의 치열한 책임과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의 소중함, 먼저 떠나보낸 자식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애중을 그 시대의 지도자로 평가한다. 신사임당이 자식을 훌륭히 길러낸 어머니로 기억된다면, 조애중은 가족의 삶 자체를 지켜낸 인물이었다. 전란 속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고 생계를 책임진 그의 삶은 충분히 여성 지도자의 서사로 연구되고 기념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에도 세종시는 귀를 닫고 있다. 귀중한 자산이 세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시는 여전히 한글 창제 시기, 곧 15세기 상징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 결과 한글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17세기 여성의 기록은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병자일기의 가치는 문학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일기는 병자호란 당시의 피난 경로, 가족 공동체의 운영 방식, 여성 간의 연대, 제사와 친족 관계, 그리고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억류된 남편과의 물품 교환 내역까지 담고 있다. 이는 정사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17세기 조선의 생활사, 특히 여성의 역할과 책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1차 사료다.

그럼에도 세종시는 이 자산을 활용한 기념 공간도, 교육 프로그램도, 도시 브랜드 전략도 갖추지 못했다. 조애중을 기리는 표지 하나, 그의 삶을 설명하는 상설 전시 하나 없는 현실은 단순한 문화 행정의 부재를 넘어선다. 이는 도시가 어떤 가치를 기억하고, 어떤 서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 결론은 분명하다. 첫째, 명칭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남평 조씨 병자일기'가 아니라 '조애중의 병자일기'로 공식 명명해야 한다. 둘째, 세종시 내에 병자일기와 조애중의 삶을 조명하는 상설 전시 또는 기념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셋째, 이를 성평등 교육, 가족사·생활사 교육, 한글 생활사 교육과 연계해 세종만의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켜야 한다.

세종임금의 이름을 도시의 이름으로 삼은 세종시라면, 한글을 문자로만 숭배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용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을 피해 떠돌며 가족을 지켜낸 한 여성, 조애중의 기록은 한글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지탱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귀중한 자산을 외면하는 한, 세종시는 여전히 '한글의 도시'가 아니라 '한글을 소비하는 도시'에 머물 수밖에 없다. /최병조 세종교육회의 공동대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서산을 철도교통 거점으로", 서산시, 4개 철도사업에 13조7천억 투입 추진
  2. 고용노동부 천안지청, 흥타령춤축제서 안전문화 캠페인
  3. 영화 ‘암살자(들)’ 논란 확산 대전시도 불똥튀나
  4. 민선 9기 허태정號 100일…민생·경제 연착륙 호평
  5. 6일부터 국회 국정감사 돌입… '충청발전' 지렛대로 활용해야
  1. [새인물] 박재현 제71대 천안서북경찰서장
  2. 충남대 노사 갈등 돌파구 찾나…학장협의회 중재안 제시
  3. 고용노동부 노동감독관 고소·고발 급증… 5개월 만에 작년수준 근접
  4. 천안세무서, 징수와 복지를 연계한 '포용적 체납관리'로 민생경제 회복 지원
  5. 온누리상품권 부정유통 117건 잡았지만… 환수 확정은 11곳

헤드라인 뉴스


트램 급전방식 연내 결론날까… 허태정 "가능한 올해 안 결정"

트램 급전방식 연내 결론날까… 허태정 "가능한 올해 안 결정"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의 급전방식 등 주요 쟁점이 올해 안에 결론 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허태정 대전시장이 민선 8기 당시 변경된 급전방식 등을 다시 점검한 뒤 가능한 연내 대전시의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허 시장은 6일 대전시청에서 열린 취임 100일 시정 브리핑에서 "트램은 대전시민의 관심이 가장 큰 교통 문제이고 사업비 규모도 가장 큰 만큼 대전시에서도 중요한 사안"이라며 "급전방식 등은 가능한 연내 결정해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민선 7기 당시 트램 사업을 추진했던 허 시장은 민선 8기에..

5년 만에 첫 삽 뜬 대전 중부소방서…내년 예산이 관건
5년 만에 첫 삽 뜬 대전 중부소방서…내년 예산이 관건

대전 중부소방서 신설사업이 추진 5년여 만에 첫 삽을 뜨면서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그동안 대전시 예산 편성 과정에서 사업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착공이 거듭 지연됐던 만큼, 2028년 준공을 위해서는 내년도 공사비 확보가 최대 관건이 될 전망이다. 대전 5개 자치구 가운데 중구만 유일하게 소방서가 없어 주민들의 우려가 컸던 만큼 민선 9기에는 차질 없이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6일 중도일보 취재결과, 대전소방본부는 2028년 중부소방서 신설을 목표로 지난달 21일 착공에 들어갔다. 연내 터파기 공사를 마친 뒤..

`표 구하기 힘든` 대전 한화생명볼파크… 3000석 늘려 2만석으로
'표 구하기 힘든' 대전 한화생명볼파크… 3000석 늘려 2만석으로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의 좌석 부족 문제가 해소될 전망이다. 프로야구 한화이글스의 흥행에 비해 관람석 규모가 부족한 탓에 개장 첫해부터 매진이 잇따랐던 만큼 팬들의 관람 여건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6일 한화이글스와 대전시에 따르면 현재 1만 7000석 규모인 한화생명볼파크 관람석을 3000석 늘려 2만 석으로 확대한다. 양측은 이날 볼파크 프레스센터에서 증축을 위한 투자 협약을 체결했다. 증설 배경에는 지난 시즌 내내 이어진 심각한 좌석난이 있다. 새 구장 개장과 함께 관중이 몰렸지만 이를 받아낼 좌석은 1만 7000석에 그쳤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지상군페스티벌 ‘북적북적’ 지상군페스티벌 ‘북적북적’

  • 러닝 열풍인데 천변길 관리는 ‘미흡’ 러닝 열풍인데 천변길 관리는 ‘미흡’

  • 국군의 날 기념행사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국군의 날 기념행사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 안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뀐 무궁화호 안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뀐 무궁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