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신숙주와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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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내일] 신숙주와 집현전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26-03-29 16:38
  • 신문게재 2026-03-30 19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백낙천 교수
백낙천 교수
세종 시대에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사회적·정치적 안정기를 누릴 수 있었던 중심에는 집현전이 있었다. 집현전은 고려 때 이름만 있었을 뿐 실제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기관이었는데 세종 임금은 젊은 학자들이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이를 확대 개편하였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에 설치되었으며, 단종 복위를 꾀하는 사육신을 비롯하여 다수의 인물들이 집현전 출신이라는 이유로 결국 1456년(세조 2)에 혁파되었다.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한 젊은 학자들을 가리켜 집현전 학사라고 하는데, 이들은 과거에 합격한 젊고 총명한 인재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다양한 학문 활동을 통해 수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세종 임금의 안정적인 집권과 문화 발전에 학문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이 서로 다른 가문 배경과 학문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정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종 임금의 학문적 영향력이 지대하였기에 가능했다. 더욱이 세종 임금은 집현전 학사들이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실시한바 하위지, 이석형, 성삼문, 신숙주 등 장원 급제자들이 수혜를 입었고, 또한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융숭한 대우를 하여 국가에서 책을 반사하면 이들이 먼저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숙직하는 학사들에게는 세종 임금이 따로 음식을 보내어 격려할 정도로 집현전은 세종의 훈민 통치에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인재들인 집현전 학사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신숙주이다. 신숙주는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75년(성종 6)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제1의 조력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었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시의 초시와 복시에 잇달아 장원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1443년(세종 25)에는 일본에 통신사로, 1445년(세종 27)에는 중국에 사은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나라의 문물을 접하고 견문을 넓혀 나갔으며, 1459년(세조 5)에 함경도 체찰사로 있을 때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 무공을 세우기도 했을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신숙주의 업적은 저술과 학문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겨 집현전의 장서각에 있는 방대한 서적을 탐독하였고 수시로 동료의 숙직을 대신하여 밤새도록 책을 읽었는데, 세종 임금이 어의를 내린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신숙주일 정도로 호학자(好學者)였다. 심지어 신숙주는 유언으로 저승 가서 읽은 책을 함께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한시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학식을 지닌 신숙주는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는 수양대군을 수행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1453년(단종 1)에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이 된 이후에는 승승장구하여 도승지, 병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신숙주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한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유학자이었지만 성품이 온후하고 관용을 베풀어 40년 동안의 관직 생활에 대간의 탄핵을 받지 않을 정도로 원만하고 너그러운 인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신숙주는 당대에는 평판이 나쁘지 않았는데, 이에는 그의 성품 외에도 탁월한 학문적 업적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계유정난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가 쇠락하게 되면서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 인식으로 점점 변하여 의리와 지조를 변절한 인물로 낙인 찍혔다. 이러한 신숙주에 대한 폄훼는 지금도 남아 있어 쉬기 쉬운 녹두나물을 애꿎게 숙주나물이라고 민간에서 와전되어 불리기도 한다. 한 인물의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공이 있다고 과를 덮을 수 없으며, 과가 있다고 공을 폄하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숙주는 성리학적 질서에 어긋난 처신으로 변절자의 이미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신숙주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여러 학문 분야에 해박한 식견과 경륜을 지녔는데, 특히 국어학 분야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는 등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조선 초 문화 융성의 황금시대를 연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숙주의 사후 공덕을 칭송하여 내린 시호가 문충(文忠)이고, 집현전 동료이자 사가독서를 계기로 돈독한 사이였던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호가 충문(忠文)인 것을 보면 문(文)과 충(忠), 그중에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삼느냐에 따라 후대의 역사가 달리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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