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오의 시조 풍경
2026-08-05
쌩쌩한 겨울 산길 올라가는 어린 머슴 도끼로 찍어낸 나무 휘어지게 짊어지고 산길을 내려올 때는 칡뿌리도 캐 얹는다 주인집 어린 아씨 알진 뿌리 잘라주고 허리춤 추스르며 슬며시 짓는 능청 가랑잎 신문지에 말아 피워 문다 담배 한 대 <시작노트>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뒤안..
2026-07-17
갯바람 등 떠밀어 오대양을 떠돌다가 시들지 않는 몸으로 남으려는 욕망의 덫 꿈꾸던 햇살에 누워 피어나는 꽃이다 한 알 생명 녹아들어 한 소절의 음악이 되고 사랑하올 임의 강 속 굽이굽이 애무하다 향 맑은 핏줄 가득히 유랑하는 꽃이다 <시작노트> 사람은 물과 소금과 바람..
2026-07-10
정의의 불꽃은 젊음으로 타오른다 불담의 숯덩이는 만수까지 기억하다 불씨를 붙이는 순간 되살아나 타오른다. 그 겨울 역사의 밤도 멈춤 없이 흐른다 정의와, 자유와, 애국과, 애족으로 도도한 불변의 흐름 만년을 와 영겁 간다. 불의를 꺾어 밟고 결연히 세운 정의 어둠을 허..
2026-07-03
이름 태운 소지를 술잔에 타 마시니 아픔보다 더 아프고 슬픔보다 더 슬퍼서 짠 맛든 눈물 몇 방울 칵테일로 대작하네 연기에 쓰는 비문 달에나 세우노니 달을 안고 가는 강물 목이 쉬어 암전이네 자네 한(恨) 녹여서 지은 종소리를 듣겠네 거느린 물안개가 사라지면 어쩔건가..
2026-06-26
텃새들 주렁주렁 매달려 살던 고향 「재개발」떼창 소리에 날개도 못 편 채 후두둑 떨어져서는 기어나가 기다린다. 고향집 다 빼앗긴 텃새들은 통곡한다 살아서 저 꼴 보느니 제 땅에서 죽을 것을 한탄을 공양 삼으며 깡통처럼 쭈그린다. 토박이 손 붙들고 몸 떨며 흔들릴 때 이..
2026-06-19
내 고향 대야리 우물곁에 회화나무 천둥·번개 다 삼키고 용트림한 벅찬 가슴 부챗살 활짝 편 가지 덩그렇게 웃는다 천년을 보아오신 신목(神木)의 기억 속에 고려 때부터 오늘까지 사랑하다 가신 선조 얼굴이 차곡차곡 담겨 새 잎으로 피어난다 지나온 천년 위에 내다보는 천년까..
2026-06-12
소록도 파도 위에 눈물 꽃 피었다 마리안 · 마가레트 두 송이 전설의 꽃 맨손을 얹어주어도 상처가 다 아물더라 소록도 파도 위에 잊지 못할 꿈이 있다 눈감으면 향기의 꽃 귀 열면 사랑 노래 치마로 닦아주신 콧물 향기롭게 피더라. 임들이 두고 가신 쉼 없는 파도 소리 대..
2026-05-31
책 내고 겪는 맘은 기쁨 반, 슬픔 반 책 보내고 남는 맘은 희망 반, 걱정 반 반(半) 아닌 한 올이래도 걸리는 맘 뒤숭숭해요. <시작노트> 단시조 집 한 권을 상재한다. 고뇌와 집념으로 책을 내면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지만 갈등이 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이 나의..
2026-05-29
폭풍우가 물어뜯어 사나워진 바닷가 날개 꺾인 파도가 파들대는 외딴 섬 싱싱한 달빛 그물망 반짝이는 저 눈망울 넘어져 알을 낳는 바다의 비명소리 바람이 덮어주고 어둠이 품어주면 등대 불 손잡고 자라 재주넘는 몽돌들 새가 된 소녀는 꿈의 날개 휘젓고 갯마을 야생화 추억을..
2026-05-20
한 올 한 올 입술 적셔 이어낸 만리(萬里) 정성 잉앗대 산을 넘고 날줄 씨줄 강 건너 뒤틀린 무르팍으로 짜 올린다 사랑 한 필 <시작노트> 우리의 어머니들은 길쌈을 해서 가족의 옷을 만들어 입혀줬다. 길쌈의 대표적인 종류가 삼베와 모시이다. 집에서 직접 삼을 재배하..
2026-05-15
파랗게 녹이 핀 동경 속을 들여다보니 일그러진 얼굴 반쪽 천진하게 웃고 있다 덫 칠한 꿈도 말라붙어 뒤틀린다 뜨거운 몸 말갛게 닦고 보니 내 얼굴에 녹이 폈다 함부로 쓴 삶의 자국 끊기고 엉긴 주름 비단폭 혈서로 쓴 만사(輓詞) 펄럭인다 동경 가득 <시작 노트> 거울을..
2026-05-08
산동네 밭이랑은 육자배기 오선지 옹이진 손마디에 녹두꽃 절로 피고 밭이랑 오르내리는 곡조 따라 노을 진다. 오선지 이랑마다 총총히 맺힌 음표 뻐꾸기 울어쌓는 산밭머리 달이 뜨면 오솔길 상모 돌리듯 빙빙 돌아 세월 간다. 철따라 파도치는 사랑바다 알록달록 피어린 알곡으..
2026-04-17
새까만 얼굴에 푹 꺼진 열아홉 눈[眼〕 허기에 불붙이면 이글이글 타는 충만 오늘도 소신공양하며 시래기죽 끓인다. 문풍지 겹겹 발라 한겨울 넘겨야지 네 식구 둘러앉아 맨손 핥고 연명해도 연탄불 꺼트리지 말아야 봄이 온다 봄이 온다. 십구공탄 소리친다. 맹물 말고 먹물 돼..
2026-04-10
어제의 겨울바람 저 멀리 떠나가고 추억의 숲길 따라 오색 꽃 빛 넘쳐나니 황홀한 손사래 치며 뜨거운 임 오시네 나의 임 면사포가 온 산천을 뒤덮으니 꽃구름 넘친 세상 생시인가 꿈인가 오! 그대 곁에 있으니 천상 낙원 한가지요 외롭고 고달픈 날 마주 보고 살아온 임 이..
2026-04-03
정의의 불꽃은 언제나 뜨거운 젊음으로 타오른다 불담을 안고 있는 기억의 숯덩이는 갑년을 지나 팔순, 구순, 백수가 되어도 불씨 하나만 붙이면 그때처럼 그렇게 젊음으로 되살아나 타오른다. 1960년 3월 10일의 의거를 기억하는 우리의 그 불꽃으로 어두운 길 밝혀줄 등불..
2026-03-28
염색을 포기했단 친구들의 흰 머리칼 하나둘 따라 하니 억새꽃밭 되었구나! 우리는 철 따라 피는 꽃 인생길의 축제이다. 깡마른 모가지에 피어난 하얀 꽃술 천연이 어우러져 노을 속에 춤을 춘다. 이 또한 꽃의 계절이니 넘치도록 축배 들자. 억세게도 살아왔던 기억들 뒤로하고..
2026-03-20
잠들지 않는 바다, 아름다운 꿈의 섬 폭풍이 닥쳐와도 평화롭게 품는 심해 산호초 일주문 열고 집 없는 놈 재워준다 등댓불 눈 비비며 늙은 시력 애를 쓰는 저 바다 푸른 빛섬 만발하는 꽃의 종교 억만년 걸어온 임이여! 내 생명의 연기(緣起)여! <시작 노트> 참으로 선..
2026-03-13
앞 절의 요강 소리 뒷 절의 해우 소리 개여울 따라가다 내가 되고 강이 되고 내포(內浦) 밖 황해에 이르자 해탈하여 출렁인다. <시작노트> 금강의 발원지를 장수 '뜬봉샘'이라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다른 생각이 든다. 세상의 발원지는 첫새벽 요강에 올라앉으셨던 어머니의..
2026-03-06
한 방에 바글바글 기대고 끌어안고 가까이 서로 보는 아 슬픈 동병상련(同病相憐) 한 친구 잡혀갈 때마다 자리 넓어 좋아지나 <시작 노트> 그것은 흡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하루 먼저 끌려가고 나면 하루를 더 살아남아 있다는 절박한 감사기도라도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2026-03-02
엄마가 주셨노니 사람 안에 신이 있다. 죽음을 박찼노니 신이 보인 사람 있다 최가온 승리의 기적에 소리쳤다 가슴마다 <시작노트> 신(神)이 어디 보이느냐고 묻지 말라. 그대 안에 있는 신이 어떻게 보이느냐? 사람마다 자신의 맨 안쪽에 자신의 신이 있으니 남들이 어찌 나..
2026-02-27
붉음을 안고 넘는 감당 못할 노을이여 한 생애 사무침을 휘감는 회오리여 늦사랑 지층 아래에서 들끓는다 활화산아! 가슴에 품은 불길 장엄하다 안 보여도 하늘보다 높은 곳에, 바다보다 깊은 곳에 단꿈을 환히 켜놓은 늦사랑 꽃 만발했다 저 산골 어둑어둑 걸어오는 그리움아 지..
2026-02-20
바람도 썰리는 칼 겨울에도 얼지 않는 애욕이 흐르는 눈 불길에도 타지 않는 무심코 내미는 손을 잡고 나면 남는 체온 석등에 켜 논 불잎 실 한 올 걸치지 않고 다정히 내주는 숨 연한 피가 흐르고 흔들고 흔들리는 영(靈) 저 댓잎은 성녀여라. < 시작 노트 > 설명할 수..
2026-02-13
시조 한 술 떠먹고 향방 없이 떠도는 길 개암 으름 익었으니 바랑 발우 놓고 가자 구름아 가린 손 내려라 달빛 채반 식을라. <시작 노트> 무욕의 보살 같은 한 시인이 이름조차 홀로 묻고 소문 없이 떠났다. 임의 탁발 길에는 바랑도 메지 않고 발우도 지니지 않으셨다...
2026-02-06
영원한 생명으로 이 지상에 남고자 창세기의 흙사발을 제단에 드리고자 일생을 홀연히 바치신 빗살무늬 예술혼 흙의 혁명, 공기의 반란, 공허한 낙화 이후 잔설로 남은 여운 목이 타는 열매의 강 오름새 가마에서 일어난 제 8일의 창세기 불길로 들어간 후 예정을 벗어난 생(生..
2026-01-30
마량포 동백꽃은 떨어져서 다시 핀다 황토 위 좌선하고 기도하는 노란 꽃술 죽어도 죽지 않는 임 우남의 혼(魂)꽃이다 산 송장 밀항하여 임시 세운 상해 정부 황해를 건너와서 다시 세운 건국 정부 한민족 영령 다 모셔다 하늘나라 세우실까 마량포 동백꽃은 팔천만 단심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