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2025-05-14
광주역 앞에서 518번 버스를 탔다. 시내를 벗어나 신록이 나부끼는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5·18 민주묘지. 가로수에 매단 줄엔 글이 적힌 색색의 리본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한 줄 한 줄 5월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감사의 마음이 적혀 있었다. 윤석열에 대한 분노..
2025-03-26
"여기 병원밥 맛있어요?" 수술 후 살을 봉합하는 의사에게 물은 첫마디였다. "글쎄요. 입맛은 주관적이라서. 저는 먹을 만하던데요." 또 사고를 쳤다. 이번엔 손목 골절. 보문산에 갔다가 빙판길에서 넘어졌다. 어려서부터 사고뭉치였는데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다. 덕분에 몸..
2025-02-12
"집밥 해드리고 싶어요." 헤드헌터 회사 대표 강지윤에게 비서 유은호가 건넨 말 한마디. 유은호는 싱글대디다. 일이면 일, 육아면 육아, 그리고 비주얼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직장 여직원들은 물론 동네 젊은 엄마들은 멀리서 딸과 함께 걸어오는 유은호의 모습을..
2025-01-15
청양과 대전은 위치상 닮은 구석이 있다. 각각 충남과 남한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대전은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통영, 목포, 강릉 등 얼마든지 당일치기가 가능하다. 서울에서 부산, 통영, 목포라.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청양도 충남권 어디든 부담없이 다니며 맛있는 음..
2024-12-26
ㅇ대전 MBC 사옥에서 나오자 하늘은 먹빛이었다. 별 하나가 반짝였다. 언론중재위원회 조정회의에서 한 시간여 긴장하고 앉아 있던 탓에 가랑이가 뻣뻣했다. 맥이 탁 풀리면서 허기졌다. 근처 곰탕집에 들어갔다. 놋쇠로 된 큰 대접에 담긴 곰탕에서 김이 올라왔다. 살코기와..
2024-10-30
유튜브 먹방 세계의 입문은 'ASMR'이었다. 어느 기사에서 순위를 달리는 먹방 유튜버들을 소개한 걸 보고나서였다. 그 중 한 먹방 유튜버를 선택해 들어간 게 시작이었다. 그땐 ASMR이 뭔지도 몰랐다. 식탁위에 온갖 디저트가 올라와 있고 주인공은 검은색 옷을 입은 상..
2024-10-09
금쪽같은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첫날은 가족과 고창 선운사에 가기로 했다. 언니 친구 아들이 그 곳 카페 피자에 꽂혀 틈만 나면 먹으러 간다고 한다. 우리는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선운사로 달렸다. 드넓은 선운사 주차장엔 차가 가득했다. 아, 축제 첫날이었다...
2024-09-11
친구의 언니 가족은 198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 갔다. 친구의 형부는 한국에서 꽤 괜찮은 직장에 다녔으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았다. 한국 이민자 대부분이 그렇듯 친구 언니네도 세탁소부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수영장이 딸린 집도 장만하고 큰..
2024-08-21
대학 2학년과 4학년 때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학기마다 제비뽑기로 방 배정을 받는데 방을 누구와 쓰느냐가 중요했다. 성격이 안 맞아 중간에 나가기도 하니까. 2학년 1학기는 정치사회적으론 격동기였으나 개인적으론 '화양연화'였다. 방 식구는 선배였는데 편하고 또..
2024-07-24
우당탕탕 쿵. 오른쪽 발목이 기역자로 확 꺾이면서 뚝 하는 느낌이 왔다. '아 망했다, 망했어.' 밤에 집 앞 상가 건물 계단을 내려오다 컴컴해서 발을 헛디뎠다. 사람이 지나가면 자동으로 점등되는데 건물주가 관리비를 아끼려고 그런 건지. 아우 승빨 나. 나도 부주의했다..
2024-05-29
올 봄처럼 이렇게 맑은 날이 있을까요? 한없이 투명한 공기가 먼 산의 숲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연초에 기상청에서 봄에 초강력 미세먼지가 올 것이라고 예보했는데 말이죠. 이런 예보는 언제라도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휴일에 보문산에 갔다가 대사동 대신초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2024-05-08
초등학교 6학년때였나? 처음으로 밥을 지었다. 모내기철이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람이 일일이 모를 심었기 때문에 농촌에선 모내기철이 제일 바쁜 시기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큰 맘 먹고 쌀을 씻어서 가마솥에 안쳐 불을 땠다. 얼추 밥이 된 것 같아 솥뚜껑을 열자 뜨..
2024-04-17
대전에서 군산을 가려면 익산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익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침을 먹었다. 떡 세 개, 찐계란, 딸기. 기차에서 먹으려다 쿨쿨 자느라 그새를 놓쳤다. 일어나자마자 밥솥에 찐 떡이 말랑말랑했다. 계란, 딸기까지 먹고 나니 허기가 가셨다. 곱게 단장..
2024-03-27
대전 중구 예술가의 집 근처에 김치찌개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 김치찌개는 밥집의 기본 메뉴다. 흔하디 흔한 김치찌개. 하지만 내가 먹어본 김치찌개 중 이곳이 단연 으뜸이다. 나름 분석하자면 육수 때문인 것 같다. TV 프로 '생활의 달인'의 식당들은 하나같이 육수가 남..
2024-02-28
그 식당을 지날 때마다 한번씩 기웃거렸다. 이번엔 문을 쓱 열고 들어갔다. 식당 상호는 딱히 없다. 그냥 '튀르키예 케밥'. 외국음식 식당은 다 그렇다. 베트남 쌀국수, 네팔 요리. 손님은 중년여성들 한 팀과 아랍인 젊은 여성 한 사람. 종업원인 듯한 여성에게 다가갔다..
2024-01-17
평일인데도 손님이 많았습니다. 이 분식집은 주말엔 자리가 없어 밖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서는 곳이에요. 지지난주 오전 일을 끝내고 대흥동에 볼일이 있어 서둘러 시내로 갔지요. 일을 마치고 중앙로 지하상가에 있는 그 분식집으로 들어갔어요. 도대체 얼마나 맛있을까 궁금했거든..
2023-12-27
나는 여행지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부산 돼지국밥, 제주도 몸국, 통영 꿀빵·물메기탕 그리고 여수는 갓김치. 갓김치의 강렬한 첫맛을 못잊어 여수에 갈 때마다 향일암부터 찾는다. 올 겨울 첫 북극한파라더니 여수도 만만찮았다. 중무장을 했는데도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향일..
2023-12-06
'인정이 몹시 그리워지는 어느날 나는 남장(男裝)을 하고 거리에 나섰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나는 소설의 이 매혹적인 첫 문장을 떠올린다. 그것은 의도적이지 않다. 그저 몸으로 체득한 강렬한 경험의 기억같은 것이랄까. 나는 초록색 아망구를 푹 눌러쓰고 플라타너스..
2023-11-15
1996년 봄 다니던 직장을 미련없이 때려치웠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이 내 손에 쥐여졌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안갯속이었다. 그래도 후련했다. 초여름 어느날, 피자가 확 당겼다. 당시 피자집은 '피자 헛' 하나였다. 오류동 미성스포츠 건물(현재 중도일보 건물) 1층에..
2023-10-25
추석 연휴 전날 밤 좀 춥게 잤더니 아침에 일어나자 대번에 목이 쎄에 했다. 시골 집에서 내내 콜록거리고 콧물을 흘렸다. 결국 노란 코가 나오는 걸 보고 심상찮다 생각했다. 대전에 와 병원에 갔더니 비염과 축농증이 같이 왔다며 항생제를 처방했다. 오래전 축농증으로 호되..
2023-09-13
아주 오랜만에 아구찜을 먹었다. 편집국장이 이사 승진으로 데스크들한테 한 턱을 낸 것이다. 회사 앞 길 건너 아구찜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자그마한데 손님이 많았다. 푸짐한 아구찜이 나오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접시에 덜어 큼지막한 살덩이를 입에 넣었다. 오, 잊을..
2023-08-23
여름은 과일의 천국이다. 복숭아, 참외, 자두, 멜론, 수박, 포도. 여기에 수입산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도 빠질 수 없다. 더위에 지쳐 입맛이 없을 때 과일은 식욕을 돋우고 몸에 생기를 준다. 새콤달콤한 자두와 꿀같은 멜론, 달콤한 향이 일품인 황도와 물이 많은 수..
2023-08-02
요란한 새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들의 지저귐이 알람 역할을 한다. 기지개를 켜고 안경을 집어 쓴다. 자 이제 또 뛰어볼까? 주방에서 거실로, 베란다로,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욕실로. 나의 부산한 아침 풍경이다. 먼저 TV 뉴스를 틀고 냉장고를 열어 수제 요거트를 꺼..
2023-07-12
10여년 전 초여름에 거문도에 갈 기회가 있었다. 지인 소개로 여행사 팸투어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내내 가고 싶었던 섬이어서 휘파람을 불며 배낭을 꾸렸다. 오래 전 난 거문도를 38선 바로 아래 백령도 근처 어디 쯤에 있는 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해에 있다..
2023-06-14
재작년 1월 설을 앞두고 편지 한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대덕구에 주소를 둔 황수남이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인데 누굴까?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내 읽었다. 첫 문장은 '나는 80세가 넘는 나이의 중도일보를 구독하고 있는 대전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