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6장-숭어리샘, 나르키소스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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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6장-숭어리샘, 나르키소스를 넘어서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6-07 17:04
  • 수정 2026-06-15 09:53
  • 신문게재 2026-06-08 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대전의 숭어리샘 전설은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며 묵묵히 삶을 일궈낸 딸이 샘물에 비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는 성찰과 기적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매혹되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나르키소스와 대조를 이루며, 샘물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비록 도시 개발로 옛 샘터들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그 속에 깃든 소망과 삶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1-봉수레미골 비석
3대하천중 유일하게 대전에서 시작되는 대전천의 발원지인 동구 하소동 만인산 봉수레미골. 사진=한소민 소장
도심 사이로 대전천과 유등천, 갑천이 흐르는 대전은 물길이 풍부해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3대 하천이 적셔주는 물길 곳곳에 샘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 물줄기에 신비로운 기적과 많은 사연을 담아 전해왔지요. 오늘날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이름으로 남은 숭어리샘(색시샘) 역시 물을 통해 병을 고치고, 자신을 돌아보며, 마침내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는 삶의 기적이 담겨 있습니다.

옛날 쫓기는 신세가 된 한 부부가 어린 딸을 데리고 둔지미(둔산)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글밖에 모르던 아버지는 땅을 일궈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와 딸은 강과 산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녔지요. 그러던 중 딸은 문정고개 너머 숭어리골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을 발견했습니다. 귀한 물이라 여겨 샘터로 가꾸어 놓고는 나물을 캐러 올 때마다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며 쉬어가곤 했지요. 어느 날 어머니가 앓아눕게 되자 그 물을 떠다 드렸는데 신기하게도 금방 나았습니다. 이후로 딸은 샘을 더욱 열심히 돌보았지요. 세월이 흘러 혼기가 차자 부모의 걱정은 깊어만 갔고, 딸은 답답한 마음에 샘을 찾았습니다. 가만히 샘을 들여다보자 수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또렷이 비쳤지요. 어쩐지 그 모습이 낯설고도 못나 보여 뒤돌아서는 순간, 뒤에서 한 젊은이가 나타나 물 한바가지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비슷한 처지인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지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딸은 서른을 넘겼고 부모님마저 세상을 떠나자 딸은 샘 근처로 가서 뗏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마침내 그 남자가 찾아왔고 둘은 부부의 연을 맺은 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이후 숭어리샘은 '색시샘'이라 불리며 시집가기 전날 처녀들이 와서 목욕을 하면 부부 금슬이 좋아지고 혼처가 막힌 이들이 오면 좋은 짝을 만난다는 속설까지 생기게 되었답니다.

2-묶어서-숭어리샘네거리
대전시 서구 숭어리샘 네거리 이정표<왼쪽 사진>와 숭어리샘이 있었다고 하는 유승기업사 부근. 지금은 둔산자이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한소민 소장
3-샘머리공원
대전시 서구 둔산동 둔지미샘 자리에 있는 샘머리 물순환 테마공원 사진=한소민 소장
이 전설에서 딸이 샘물에 자기 얼굴을 비춰 보는 장면은 의미있는 대목입니다. 샘물이나 맑은 우물은 신화학적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거울 역할을 하지요. 물 속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은 단순한 외모의 확인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때 성찰이 아닌 집착으로 인한 비극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지요. 바로 자신에게 갇혀 죽음에 이른 나르키소스(Narcissus)입니다.

나르키소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요정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수많은 여인과 요정들이 그를 사랑했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지요. 그를 애타게 사랑했던 숲의 요정 에코(Echo)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목소리만 남은 메아리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모두의 사랑을 거절하던 나르키소스는 어느 날 물을 마시려다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고 맙니다. 연인을 갈망하듯 자기 자신을 원했지요. 입맞춤을 하고 손을 잡으려 했지만 물결이 이는 순간 그 모습은 사라지곤 했습니다. 끝내 닿을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힌 그는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죽게 되었고, 그 자리에 수선화가 피어났습니다.

4-천근 벙어리샘
대전시 중구 보문산로 229번지에 자리한 천근 벙어리샘. 선녀님께 백일동안 간절히 기도해서 말문을 트이게 되었다는 기적의 샘으로 대전의 3대 샘 중 유일하게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한소민 소장
하지만 숭어리샘의 딸은 달랐습니다. 숨어 살며 어렵게 지내는 동안 병든 어머니까지 돌보느라 자신을 가꿀 여유도 없었고, 혼기를 놓친 채 나이 들어가는 얼굴이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았을테지요. 하지만 그녀는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묵묵히 부모를 봉양하고 샘을 돌보며 자신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렸던 소중한 인연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똑같이 샘을 들여다보면서 누군가는 자신에게 갇혔지만, 또 누군가는 자신을 온전히 받아 들이며 그 위에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숭어리샘 전설이 전해주는 지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전의 3대 하천 곳곳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샘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간절한 기도 끝에 말문이 트이게 됐다는 벙어리샘과 맑은 물로 사랑받았던 둔지미샘, 그리고 숭어리샘이 대전의 3대 샘으로 손꼽혔다고 하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벙어리샘의 흔적만이 남아있습니다. 소중한 이야기들의 현장이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도 그 안에 깃들었던 소망과 기적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땅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샘 솟고 있을 이 물길 위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할까요?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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