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대한여자독립선언서 19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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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3년 10월25일자 4면에 실린 ‘내가 겪은 20세기’ 최금봉 여사의 인터뷰. 지면 가운데가 최금봉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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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싸웠고, 나라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는 건 몇 줄의 글과 문서뿐. 이름도 사진도 없고 그들이 떠난 날짜조차 우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변명이겠지요.
대한人 다섯 번째 주인공 여성독립운동가 ‘최금봉’입니다.
사실 자료를 찾으면서 최금봉의 또 다른 이름이 ‘최매지’였음을 그녀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최초 여자 치과의사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들이 피 흘려 이룩한 이 땅의 평화에 대해서 무지했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대나무처럼 굳건한 마음으로
1896년 인천 제물포에서 태어난 최금봉은 일찍이 기독교신앙으로 신문화를 접한 할머니의 영향으로 개화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많이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집안의 교육열이 뜨거웠는데, 큰아버지인 최병현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 인천영화학교와 내리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답니다.
최금봉이 10살이 되던 해,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를 하는데, 이곳이 그녀의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의 본거지가 됩니다. 이후 1918년 삼숭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당시 황에스더와 김경희가 조직한 비밀결사단체 ‘송죽회’에 가입해 항일독립의식 고취와 독립지사 가족 후원활동을 펼칩니다. 이후 1916년 송죽회가 지방조직을 결성할 때 남포지역 책임자로 선임되어 조직 확대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이후 1919년 비밀결사단체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부녀자들의 애국정신과 군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한참 활동을 펼치던 그녀는 1920년 일본경찰에 붙잡히고 평양복심법원에서 2년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최금봉은 나라를 위해 자립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고, 가난한 백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사가 제일 적합하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이후 도교여자치과전문학교에 입학해, 본과를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평양에 치과를 개업합니다. 당시 조선인 의사, 여의사는 드물었던 탓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최금봉은 이 병원을 통해 계몽과 봉사를 주된 업무로 삼았다고 합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1945년 대한애국부인회 안동군 지부장을 맡고 다시 찾은 내 나라를 건설하는데 여성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8·15 광복 당시 광복절 기념식 안동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을 만큼 최금봉은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염원하던 독립과 자유를 찾았으니 이제 단결해서 국가건설에 이바지할 때다. 그런데 좌익이니 우익이니 나뉘어 싸움질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애국지사들의 공을 도둑질해서 국민을 기만하고 민족을 분열시키려 한다. 이러한 자를 만들어낸데는 어머니의 책임이 크다.”
공산당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역설하던 최금봉은 이 발언으로 좌익단체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그들의 최금봉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죠.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최금봉은 피난가지 못한 채 서울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정부는 최금봉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처음 자료를 찾을 무렵에는 최금봉의 사망날짜가 모든 사이트에서 알 수 없거나 모름으로 표기 돼있었으나, 1983년 11월 4일 동아일보에서 부고소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향년 87세였고, 서울 강서구 목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합니다.
▲되찾은 나라, 여성의 힘으로 대한애국부인회
3·1운동 직후 평양에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장로교파와 감리회파의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는데, 독립군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다는 목적 아래 대한애국부인회로 통합하게 됩니다. 본부는 서울에 두고 각 지방에 부인회 지회로 흡수했고 회원은 약 100여명에 달했다고 하네요. 이 당시 회원과 동지를 통해 군자금 2100원을 모았고, 자금은 두 차례에 걸쳐 김정목과 김순일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대한애국회의 목적은 부인들의 의식을 각성시켜 국권과 인권의 회복을 목표로 했다는 점인데, 국민 된 의무를 실천하자는 여성들의 인식이 시대를 앞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한 외침, 1350자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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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27일 국가지정물로 지정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연합뉴스 제공 |
1983년 11월 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 씨의 미국 집에서 한지 문서 한 장이 발견됩니다. 가로 49cm, 세로 31cm에 붓으로 1350자가 쓰여 있는 이 문서는 바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입니다. 현재까지 3·1운동과 관련된 독립선언서는 20종이 넘지만 여성이 주도한 독립선언서로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순수한 한글로만 작성됐고, 중국 만주 길림에서 발표됐고 작성자는 근대 교육을 받은 기독계 젊은 여성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27일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됐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었죠.
일제강점기 조국을 찾기 위한 독립운동은 결코 남성들만이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더욱 컸고 그들의 용기있는 동참과 의식은 여성사에 있어 소중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최금봉 이름 석자를 통해 1919년을 돌아봅니다. 치열한 독립운동과 치욕의 나날들 속에서 여성들은 결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대나무처럼 강인했던 그녀들의 힘이 더해져 우리는 광복의 빛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그녀들의 이름들을 모른 채 살아왔으나, 이제는 알아야겠습니다.
최금봉, 유관순, 지복영, 황에스더, 김경희, 남자현 … 그녀들의 치열했던 1919년, 아팠던 1919년을 기억하겠습니다. /이해미 기자
*이 기사는 1973년 경향신문 최금봉 여사 인터뷰 지면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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