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은박지 넘나든 활력의 선…거장 이중섭, 대전서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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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은박지 넘나든 활력의 선…거장 이중섭, 대전서 마주하다

회화·은지화·서한화 등 100여 점 공개…9월 27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지역동행' 첫 결실… 대표작 '황소' 등 총망라
전쟁과 이산의 시련 뚫고 완성한 거장의 치열한 조형 세계

  • 승인 2026-08-20 16:53
  • 신문게재 2026-08-21 9면
  • 최화진 기자최화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의 ‘MMCA 지역동행’ 첫 사업으로 대전시립미술관에서 9월 27일까지 ‘이건희컬렉션: 이중섭’전이 개최되어 유화, 은지화, 편지화 등 100여 점의 유작과 사료를 대중에게 공개합니다.

이번 전시는 전쟁과 이산의 고통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중섭의 치열한 예술혼과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합니다.

특히 저렴한 관람료로 시민의 문턱을 낮춘 이번 행사는 한 예술가의 비극적인 생애가 빚어낸 유산이 시대의 공공 자산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확인하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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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미술관 3·4전시실에서 9월 27일까지 'MMCA 이건희컬렉션: 이중섭'전이 열린다./사진=대전시립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MMCA 지역동행' 첫 포문…'이건희컬렉션:이중섭'전 9월 27일까지

'황소'를 캔버스에 거칠게 모셔 온 화가, 담뱃갑 은박지에 매서운 철필로 아이들의 활력을 새긴 가난한 천재, 그리고 바다 건너 가족을 그리워하다 요절한 비운의 예술가. 우리가 상투적으로 소비해 온 이중섭(1916~1956)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작품들은 슬픈 전설이라는 통속적 수식 안에 가둬두기엔 너무나 뜨겁고 치열한 조형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

수도권에 집중됐던 거장의 숨결을 지역 주민의 일상 가까이에서 전하기 위한 뜻깊은 상생 협업이 대전에서 첫 신호탄을 쏜다.

대전시립미술관은 오는 9월 27일까지 3·4전시실에서 선보이는 'MMCA 이건희컬렉션: 이중섭'전을 연다. 대전에서 최초로 열리는 이중섭 단독 기획전이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본격화한 'MMCA 지역동행' 사업의 첫 결실이다. 대전을 거친 전시는 오는 10월 울산시립미술관으로 열기를 이어간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컬렉션'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소중한 자산을 공공의 기억으로 전환한 이 대형 컬렉션을 바탕으로 유화,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등 유작 100여 점과 사료 30여 점이 대중에 공개된다. 관람료는 성인 500원, 학생 300원으로 확 낮춰 시민 누구나 부담 없이 문턱을 넘을 수 있게 했다.

기자간담회에서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근현대미술팀장은 "지역 거점 미술관과의 협력을 통해 다채로운 문화 자산을 주민들이 생활권 내에서 풍성하게 누리도록 기획했다"고 밝혔다.

윤의향 대전시립미술관장 역시 "널리 알려진 대표작뿐 아니라 은지화와 편지화까지 모아 작가의 치열했던 예술혼과 진한 가족사랑을 깊이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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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미술관 'MMCA 이건희 컬렉션:이중섭'전에 전시된 이중섭 작가의 대표작 황소./사진=대전시립미술관 제공
▲핏빛 슬픔을 선으로 빚어낸 거장…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

이중섭은 한국 시각예술사에 대체 불가능한 족적을 남긴 거장이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정주 오산학교 시절 스승 임용련을 만나며 본격적인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도쿄 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유학하며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빠르게 흡수했고, 이때 훗날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났다.

그러나 그의 삶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그대로 겹쳐진다.

태평양 전쟁의 여파 속에 귀국한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원산을 떠나 제주 서귀포와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극심한 생활고와 피란살이의 결핍 속에서 결국 1952년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가족과 헤어진 이중섭은 통영, 대구, 서울 등을 전전하며 지독한 이산의 고통과 그리움 속에서 홀로 작업에 몰두했다.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연 개인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수금 문제와 사기로 좌절을 겪은 그는, 영양실조와 거식증, 간질환에 시달리다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눈물겨운 생애 속에서도 그의 붓끝은 결코 절망에 눌리지 않았다. 이중섭은 주로 소, 아이들, 게, 물고기, 비둘기, 과복(복숭아) 등 자신과 가까운 삶의 모티프를 화폭에 담았다. 특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작으로 꼽히는 '흰소'와 '황소'는 거칠고 스피디한 굵은 필선으로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화가 자신의 분노·한을 동시에 표현해 낸 걸작이다.

또, 서귀포 피란 시절의 기억이 담긴 '서귀포의 환상'이나 '두 아이와 물고기 및 게'는 가난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린 유토피아적 작품이다. 아이들과 해양 생물이 한데 어우러져 노는 모습은 조선 백자의 철화 문양이나 민화의 해학성을 떠올리게 한다.

재료가 없어 담뱃갑 알루미늄 종이를 긁어 그린 은지화(은박지화)와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 띄운 서한화(편지화) 역시 이중섭의 대체 불가능한 시그니처다.

서양 포비즘(야수파)과 표현주의의 강렬함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적 미의식과 핏빛 슬픔을 압도적 조형미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그가 오늘날까지 한국 미술사의 거장으로 헌사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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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이건희 컬렉션:이중섭'전 3전시실./사진=최화진 기자
▲캔버스·은박지·종이…바탕 재료를 넘나드는 활력의 선

제3전시실은 이번 전시의 가장 핵심적인 조형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공간이다.

유화,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등 바탕 재료와 매체의 특성에 따라 이중섭의 독창적인 도상들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어떤 방식으로 다채롭게 변주되며 확장되는지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닭과 새, 가족과 아이들, 게와 물고기, 그리고 황소에 이르기까지 그가 평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려낸 모티프들은 단순한 소재나 풍경의 재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과 피란, 이산이라는 극단적인 시련 속에서도 화가가 끝내 놓지 않았던 삶의 장면들이자, 척박한 현실을 뚫고 나온 매서운 창작의 흔적이었다.

가장 먼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곳은 회화 섹션이다. 이곳은 이중섭 특유의 굵고 거친 필선과 단단한 질감이 캔버스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만개하는 현장이다.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흰소'와 '소' 연작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중량감과 함께 역동적인 생명력을 뿜어낸다.

초기 엽서화에서 사람, 자연과 나란히 어우러지는 작은 형상에 불과했던 소가 회화에 이르러 어떻게 화면의 당당한 주체로 진화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뭇 흥미롭다. 여기에 1950년대 특유의 경쾌한 색채와 유기적인 선묘가 돋보이는 대표작 '춤추는 가족', 두 마리 닭의 격렬한 다툼을 강렬한 필치로 담아낸 '투계(鬪鷄)', 그리고 가족과의 행복했던 순간을 투영한 '가족과 첫눈' 등이 전열을 갖추며 관람객을 압도한다.

은지화 섹션은 궁핍한 여건을 독창적인 조형 가능성으로 역전시킨 이중섭의 천재적 집념이 빛을 발하는 파트다.

담뱃갑 내부의 알루미늄 은박지를 철필로 깊게 긁어 선을 새긴 뒤, 그 위에 물감을 바르고 문질러 닦아내는(wiped off) 방식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정교한 금속 은입사 공예의 미감을 떠올리게 한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도 영구 소장되며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은 이 작고 차가운 금속 표면 위에서 아이들과 동물의 선들은 서로 포개지고 엉키며 끊어질 수 없는 단단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회화에서 하나의 대상이 강렬한 존재감으로 드러난다면, 은지화에서는 여러 형상이 함께 맞물려 움직이는 생생한 장면을 연출한다. 특히 움직임이 정지되고 고요한 응시만 남는 '부처'와 '가족을 그리는 화가'에 이르면 화면은 깊은 침묵과 승화된 정서를 선사한다.

사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유롭게 감행된 조형 실험은 엽서화와 편지화 파트에서 절정을 이룬다.

1940년대 도쿄 문화학원 유학 시절 훗날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말 대신 전했던 그림엽서들은 손바닥만 한 화면 위에서 유채, 잉크, 크레용, 먹 등 다양한 재료를 거침없이 오간 흔적을 보여준다. 먹지를 대고 눌러 그린 선의 흔적은 훗날 은지화의 철필 선묘로 이어지는 조형 감각의 기틀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글과 그림이 하나의 화면에서 완벽한 호흡을 이루는 편지화 역시 이중섭만의 독자적인 형식이다.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그림은 글의 내용을 확장하고, 글은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멀리 있는 이에게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 서로를 따스하게 감싸쥐는 손, 그리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애절한 문장은 이산의 아픔 속에서도 끝내 서로를 붙잡고자 했던 화가의 눈물겨운 사랑과 숭고한 예술혼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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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MMCA 이건희컬렉션:이중섭'전 4전시실에 시민들이 전시를 감상하고 있다./사진=최화진 기자
▲한 개인의 고단한 궤적이 시대의 공공 유산으로 남기까지

제4전시실은 앞선 전시실에서 목도한 강렬한 작품들을 화가의 삶이라는 시간의 축과 세상을 떠난 이후 구축된 기억의 궤적 속으로 다시 끌어다 놓는 아카이브 공간이다.

3전시실이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작품 감상의 장이었다면, 4전시실은 사료와 기록을 정밀하게 추적하며 한 예술가의 생애와 그 유산의 가치를 가늠해보는 역사 탐구의 장으로 관람의 시선을 전환한다.

전반부는 1916년 태어나 1956년 40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이중섭의 굴곡진 생애를 편년체로 충실하게 쫓아간다.

정주 오산학교 시절 스승 임용련을 통해 서구 미술의 기초와 드로잉 교육을 받던 맹아기부터, 도쿄 문화학원 유학기와 신미술가협회 활동, 그리고 원산, 제주 서귀포, 부산, 통영으로 이어진 고단한 피란 및 이동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 고단했던 이동의 궤적 속에서 아이와 가족, 게와 물고기, 황소라는 핵심 모티프가 완성되고 은지화라는 독창적 매체가 발아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1952년 '제1회 기조전' 안내문과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열렸던 '이중섭 작품전' 안내문 등 당대 전시 리플릿은 화가가 생전 미술계 현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호흡했는지를 증언한다.

여기에 더해 '민주고발', '황금충', '저격능선' 등 당대 출판 서적의 표지화 실물 자료들은 그가 캔버스라는 제한된 화폭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의 출판 및 문화 지형 속에서 자신의 조형 언어를 끊임없이 실천하고 확장해 나갔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사료다.

후반부는 1957년 작가 타계 이후, 인간 이중섭의 유산이 어떻게 공공의 기억으로 승화하고 축적되어 왔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세상을 떠난 직후 개최된 유작전과 추모전을 시작으로, 당대에는 궁핍의 부산물로 치부되었던 은지화와 엽서화가 재발견되고 미술사적으로 새롭게 정립되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아냈다.

또, 제주 서귀포 피란 거주지의 복원 과정과 이중섭미술관의 설립, 학계의 카탈로그 레조네(전작 목록) 발간 및 연구서, 다양한 전시 도록과 아카이브 자료가 전열을 갖춘다. 한 개인의 고독하고 비극적인 유산이 수많은 연구와 전시를 거치며 어떻게 오늘날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시대의 기억이자 거대한 공공 유산으로 축적되었는지를 입체적으로 복원해 낸다.
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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