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무지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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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무지의 베일

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 승인 2026-06-30 17:55
  • 신문게재 2026-07-01 18면
  • 고미선 기자고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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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공정함'을 이야기한다. 시험, 취업, 세금, 복지의 공정성을 늘 이야기하지만, 공정하다는 기준은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함은 존재할까? 미국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이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생각 실험을 제시했다. 바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롤스는 우리가 사회의 기본 규칙을 정하기 전, 두껍고 어두운 무지의 베일을 쓴 채 가상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고 한다. 이 베일을 쓰면 나의 성별, 나이, 인종, 재산, 학벌은 물론이고 나의 성격, 심지어 내가 어떤 재능을 타고났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사회에서 상류층이 될지, 하류층이 될지 모르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제도를 설계하게 될까?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음식을 나누고, 다른 사람이 먼저 고르라고 했을 때를 가정해 보자. 음식을 나누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만큼 가지게 될지 모른다. 가장 작은 부분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정확하게 나누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기회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규칙을 만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 즉 무지(無知)가 역설적으로 가장 완벽한 '공정함'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무지의 베일의 핵심이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무지의 베일이 필요한 순간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동산 문제다.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은 세금을 낮추길 원한다. 반대로 집이 없는 사람은 집값 안정을 원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어느 위치에 있을지 모른 채 부동산 정책을 정해야 한다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은 지나친 특혜보다는 최소한 누구나 살아갈 수 있는 주거 환경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건이 좋은 교육 환경에서 자란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은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환경을 기준으로 정책을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어떤 여건에서 태어날지 모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구든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청년 세대의 취업 문제도 그렇다.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수도권과 지방의 기회 차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설지 모른다면, 사람들은 극단적인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사회 안전망과 공정한 기회에 대한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마트나 아파트 주차장이 아무리 붐벼도 입구와 가장 가까운 편한 자리는 늘 장애인 주차구역으로 비어 있다. 우리가 이를 분노하지 않고 제도로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지의 베일 뒤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의의 사고나 질병, 혹은 노화로 인해 언제든 후천적 장애를 가질 수 있는 존재다. 내가 내일 당장 그 자리가 절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무언의 합의가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그 공간을 비워둔다.

반면, 현실 사회에서는 종종 이 베일이 너무 쉽게 걷히곤 한다. 부동산 정책을 짜는 관료들이 이미 강남에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거나, 노동법을 개정하는 정치인들이 평생 노동자로 살아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규칙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롤스가 "규칙을 만들 때는 반드시 무지의 베일 뒤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지의 베일은 나를 지우고 타인의 처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성적인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기적이다. 내가 강자일 때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단순한 시혜나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약자가 되었을 때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투자이자, 우리 사회 전체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우리가 각자의 계급장과 조건을 잠시 내려놓고 무지의 베일 뒤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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