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정치의 품격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 오피니언
  • 프리즘

[프리즘] 정치의 품격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 승인 2024-10-22 15:04
  • 신문게재 2024-10-23 19면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유재일 대표님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이 말은 앤디 윌리엄스가 영화 「러브 스토리」(1970)의 테마곡을 노래로 부른 Where do I begin의 첫 마디다. 영화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멜로물인데, 노래가 사람들에게 사랑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감동적으로 상기시켜 준 덕분으로 세기의 명화 반열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일이 일어난 데에는 노래의 곡조가 감상적이면서도 장엄했기 때문이겠지만, 노래의 첫 단어를 '언제부터(when)'가 아닌 '어디서부터(where)'로 부른 것이 묘한 영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랑 이야기는 사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보다는 사랑이 여러 난관 속에서도 위대해질 수 있는 진원이 핵심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증오 이야기도 증오를 지독하게 만드는 진원에 대해 불편함 속에서도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증폭하기 때문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최근 한국정치의 특성을 지적하라면, '증오정치'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인 만큼 경쟁과 대결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대화와 타협이 함께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정치는 오래 전부터 경쟁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경합(agonism)의 정치에서 화해 불가능한 행위자 간의 관계인 적대(antagonism)의 정치로 변질되어 왔다. 지금은 이 같은 증오정치의 수준이 상대방을 괴멸(壞滅)하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 아닌가 본다. 오스트리아의 법정신의학자인 라인하르트 할러는 '증오의 역습'(2022)에서 "증오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두운 열정"이라고 설파한 바 있는데, 현재의 한국 상황이 이와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증오는 선거국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다.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측이 선거를 이틀 앞두고 박정희 후보의 여순사건 관련 사실을 폭로한 해프닝이나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 측이 노무현 후보 장인의 남로당 활동 이력을 들고 나온 색깔론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같은 형태는 선거 때마다 대동소이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근래 들어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불거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썽사납다. 2022년 대선이 끝난지 2년 반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치열하게 경쟁했던 당사자들이 지금까지도 죽자 사자 열전 중이다. 더군다나 이 이전투구에 당사자들의 배우자가 나름의 연유와 빌미가 있겠지만 끊임없이 불러내지고 있는 상황이다. 가히 상호괴멸적이고 수치스러운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정치의 품격을 따지기 이전에 사람의 품위를 거론하는 것조차 민망스러운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에 따라 생존투쟁, 인정투쟁, 초월투쟁 등의 양상으로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생존투쟁을 하고, 정치인은 권력을 얻기 위해 인정투쟁을 한다. 그리고 도인(道人)은 사람의 유한함을 넘어서기 위해 초월투쟁을 한다. 이 중 정치인은 누구보다도 권력의 원천인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그 명예에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전쟁 와중에서도 적장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격을 삼가는 아량인 금도(襟度)가 있다. 하지만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보통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마저 금도를 잃어버리고 정치를 증오의 열망으로 나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지 매우 우려스럽다.

현재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증오정치는 차별과 혐오의 정치문화, 승자독식과 배제의 정치제도, 공공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 등에서 배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 간의 적대 및 애증 관계도 한몫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같은 증오정치의 사슬을 누가 먼저, 어떻게 끊을 것인가?

아무래도 대통령이 물꼬를 트는 것이 순리이며, 국정 책무성의 측면에서도 우선 순위일 것이다. 또한 여·야당 대표들도 국민의 힘든 삶을 개선하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한 발씩 물러서서 성찰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정치지도자들은 적대와 배제의 증오정치에서 벗어나 경합과 협치의 통합정치의 장으로 나서야 한다. 아마도 이 같은 성찰과 실천 정도에 따라 한국정치의 품격도 그에 비례해 나타날 것이다.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국립한밭대 연구자 11명, 세계 상위 2% 과학자 선정
  2. 대전 배추값은 낮아졌지만 속재료는 인상... 김장철 앞 부담 늘어날까
  3. 서산 석림동 아파트 화재로 주민 70여 명 대피, 재산피해 2,449만 원
  4. 천안지역 택시 운수종사자 조합, 택시통합·행복콜 폐지 성토...'사회적 합의 우선'
  5. 청주 원도심 다시 잇는다… 공간·상권·생활에 새 활력 대혁신
  1. "부지 매입비 아끼고 주차난 푼다"…인천시, 공원 지하에 주차장 800면 조성
  2. 대전 태평동5구역 재건축 사업 난항… 시공사 선정 문제에 조합 내부 갈등까지
  3. 단양온달문화축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되살렸다…'상여·회다지놀이' 눈길
  4. 허태정號 기조실장 '믿을 맨' 오나 친정체제 강화
  5. 멈춰 선 충남교육공무직 순환전보… 법적 판단이 분수령

헤드라인 뉴스


`국가기관 집중` 세종, 2차 공공기관 이전도 촉각

'국가기관 집중' 세종, 2차 공공기관 이전도 촉각

44개 중앙행정기관의 세종 이전이 공식화된 가운데, 4분기 중 발표를 앞둔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가능성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세종시는 수도권 40개 공공기관을 중점적으로 유치 활동을 벌여왔는데, 기존 혁신도시 중심의 이전 검토에서 세종에 대한 안배를 어느 정도 고려할지 여부가 관건으로 꼽힌다. 14일 국무조정실 등에 따르면 정부는 수도권 공공기관 중 지방 이전 대상을 검토 중이며 올 4분기 발표할 계획이다. 앞서 2003년 첫 공공기관 이전에 물꼬를 튼 데 이어 두 번째 이전 계획이다. 1차 기관 이전에선 총 112개 기..

대전산단 등 3곳에 734억 기업투자… 제조·연구시설 확충 추진
대전산단 등 3곳에 734억 기업투자… 제조·연구시설 확충 추진

대전의 산업단지 3곳에 734억 원 규모의 기업 투자가 추진된다. 기존 산업단지 내 생산시설을 증설하거나 신규 산업용지에 제조·연구시설을 구축하는 것으로, 100명 이상의 신규 고용도 이뤄질 전망이다. 대전시는 14일 시청 중회의실에서 ㈜액스비스, ㈜파미, 한솔제지㈜ 등 3개 기업과 총 734억 5000만 원 규모의 투자 및 신규 고용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기업별 투자 규모는 액스비스 200억 원, 파미 295억 원, 한솔제지 239억 5000만 원이다. 신규 고용계획은 각각 45명, 39명, 20명으로 모두 104명이다...

이재명 대통령 두 번째 비서실장에 홍성 출신 임광현 국세청장
이재명 대통령 두 번째 비서실장에 홍성 출신 임광현 국세청장

충남 홍성 출신인 임광현(57) 국세청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두 번째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강훈식 비서실장은 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풍부한 행정 경험과 정무 감각을 겸비한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이라며 "국회와 정부를 두루 경험한 만큼 국민 목소리를 국정에 더 크게 반영하고 당정청 협력으로 국정 성과에 속도를 낼 적임자"라고 밝혔다. 이어 "민생 회복과 사회 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주문을 실천하며 국민이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브리핑에 동석한 임광현 신임 비서실장은 "1995년 공..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유성국화축제 ‘준비 착착’ 유성국화축제 ‘준비 착착’

  • 어르신들의 신중한 한수 어르신들의 신중한 한수

  • 기온 뚝…‘겉옷 챙기세요’ 기온 뚝…‘겉옷 챙기세요’

  • 구직자들로 북적이는 대전 일자리박람회 구직자들로 북적이는 대전 일자리박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