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노인신문] 사라지는 고향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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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노인신문] 사라지는 고향을 기록하다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마을기록 이야기'

  • 승인 2026-06-29 10:19
  • 신문게재 2026-06-26 11면
  • 한세화 기자한세화 기자
대덕구 목상동 마을전경
지금은 사라진 대전시 대덕구 목상동 1980년대 전경(현재 대전 대덕산업단지 조성 이전 모습)
박기선명예기자
박기선명예기자
▲사진 한 장이 나를 불러 세우다=고향은 변하고 있었다. 논과 밭이 있던 자리에 공장이 들어서고, 흙길은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전시 대덕구 목상동은 원래 충남 대덕군 신탄진읍 목상리였다. 금강과 갑천이 만나는 넓은 들판(새일들)이 펼쳐진 농촌마을이었고, 장마철이면 강물이 넘쳐 농경지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토질이 비옥해 농사가 잘되던 곳이었다. 이후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홍수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넓은 농경지는 산업단지로 변했다. 끝없이 펼쳐졌던 들판은 공장지대로 바뀌었고, 익숙했던 마을 풍경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날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에는 지금은 사라진 마을 풍경과 사람들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사진 속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그날 이후 나는 옛 사진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고,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선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진 한 장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사진관에 가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가족행사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진을 남기기 어려웠다. 어렵게 찾은 사진들은 낡고 빛이 바래 있었지만 그 안에는 살아 있는 마을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모내기하던 들녘, 학교 운동회, 마을잔치, 경로잔치, 혼례와 회갑연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진을 본 어르신들은 서로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누구 아버지"라거나 "저 아이가 지금은 환갑이 넘었다"며 옛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진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을 깨우는 열쇠였다.

▲우리 집 앨범을 펼치다=마을 사진을 정리하던 어느 날,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 앨범을 꺼내 들었다. 형제들이 보관하고 있던 사진첩을 찾아보며 마을 풍경과 가족사진을 함께 정리했다. 누렇게 변색된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나와 형제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시간은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흙마당에서 뛰어놀던 기억, 추석날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학교 운동회 날의 설렘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은 오래도록 눈길을 붙잡았다. 그 사진 속에는 어려운 시절에도 가족을 지켜내려 했던 젊은 부부의 희망과 책임감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제야 마을의 역사는 결국 가족의 역사이며, 가족의 역사는 곧 나 자신의 역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다=사진을 볼수록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오셨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속에서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논밭과 집안일을 오가며 7남매 자식들을 키워냈다. 처녀 시절 영등포 방직공장에서 일했던 이야기, 시집와서 겪었던 어려움, 가난 속에서도 가족을 지켜냈던 이야기들을 종종 들려주곤 하셨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치매를 앓게 되었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낙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가족 모두가 마음 아파하며 곁을 지켰다. 사진 속 젊고 건강했던 어머니의 모습과 기억을 잃어가던 노년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지금은 사진만 남아 있지만, 사진 속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계신 듯하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어머니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어머니,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지금도 마음속에서 조용히 되풀이된다.

▲기록은 기억을 살리는 일=수집한 사진들은 결국 사진전이 되었고, 사진집으로 이어졌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사진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고, 세상을 떠난 부모와 이웃을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사라지는 마을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 과정은 고향을 찾는 여정이었고, 가족을 만나는 여정이었으며,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산업단지로 변해버린 고향의 풍경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사진은 과거를 보여주는 종이 한 장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삶이 있고, 가족의 사랑이 있으며, 공동체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래서 기록은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나는 오늘도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본다. 그 사진 속에는 사라진 고향과 그리운 사람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박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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