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근대 계몽기 한글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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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내일] 근대 계몽기 한글의 위상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22-06-19 08:49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학장
백낙천 교수
19세기 후반까지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는 한문이어서 외교 통상 조약 문서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쓰였다. 그러다가 1894년 고종이 내린 칙령으로 공문서 개혁이 시도되면서 국문에 대한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즉, 1894년 11월 21일 갑오개혁의 추진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에서는 고종이 관리들에게 내린 총 8개의 조항 중에서 칙령 제1호로 <공문식>을 반포하면서 국문을 나라의 공식적인 문자로 선포하였다.

그해 12월 12일에 고종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태묘에 가서 선왕들에게 고하면서 이를 <서고문>에 담았으며, 이것을 다시 <관보>에 국문, 한문, 국한문의 세 문체로 실었으니 이것이 1895년 1월에 공포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홍범 14조>의 기본 강령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조항인 14조를 통해 그동안 언문으로 불렸던 한글을 공식 문자로 삼아 '國文'이라고 새롭게 명명하면서 '나랏글'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전적으로 국문을 사용할 것을 규정한 것은 아니어서 다분히 선언적 의미가 강하기는 했지만 한문 중심의 견고한 문자 질서의 해체와 함께 국한문체의 존재가 부각되는 계기가 마련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근대 계몽기에는 국한문체가 널리 쓰였는바, 일찍이 유길준이 서구 열강의 문화 접촉에서 얻은 견문과 세계 시민 의식을 제시한 것으로 1895년에 출판한 『서유견문』이 대표적인 국한문체의 정형성을 보여 주고 있다. 유길준은 어렸을 때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한시와 한문 서간에 능숙할 정도로 한문 지식이 해박한 근대계몽기 유력한 개화 사상가였다. 『서유견문』은 어느 정도의 한문 문해력을 갖춘 지식인까지도 폭넓은 독자층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유길준에게 있어 국한문체는 당시의 언어 현실을 고려한 절충적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즉, 국문을 가르칠 교육 환경이 구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국한문체는 계몽을 위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해야 하는 당시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체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독립신문>이 국문 전용의 신문을 창간하면서 고종의 <칙령 제14조> 정신인 '國文 本位'의 실현이라는 선구적 모범을 보여 준 것은 주목할 일이다.

<독립신문>의 국문체는 주시경이 <독립신문>에 <국문론>을 발표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주시경이 우리말과 우리글에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게 된 데에는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나아가 주시경은 국가와 국어를 운명 공동체로 인식하는 등 국어를 민족자주 정신과 나라의 바탕으로 삼는 투철한 국문관을 표방하였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1897-1910)에는 국권이 약화되어 가면서 애국과 계몽이 깊게 뿌리 내렸는데, 19세기 이후 근대국가 형성의 기본 원리인 민족주의의 보편성이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국어의 존망과 민족의 생존을 동일시하는 의식을 견인하면서 한글은 국가적 혹은 근대적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 계몽기는 애국 계몽 의식이 드러나고 언어 민족주의 사상이 전개된 시기로서 특히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의식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더욱이 국문을 공식 문자로 선언하였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상징성을 지닌다. 또한, 지배적 문체인 국한문체는 서서히 그 자리를 한글에 물려주게 되면서 한문 중심의 문자 질서의 해체가 시대적 순리로 작동하면서 한글은 국민의 문자 생활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한글은 통일화와 표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위상을 더욱 강화하게 되면서 한글 대중화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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