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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영선 비래영광교회 담임목사 |
기독교 절기 중에도 이처럼 아리고 쓰린 시기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절기가 종려주일이다. 2000년 전,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했다. 그러나 그 환호성은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군중 심리에 휩쓸려 그들은 예수에게 등을 돌렸고 급기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안색을 바꿨다. 인간의 간사함과 변덕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아리고 쓰린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는 두 명의 행악자가 함께 못 박혔다. 그 둘은 같은 처형 방법과 같은 장소, 똑같은 고통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지만, 두 명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한 죄수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비아냥거렸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분노와 독기만을 뿜어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곁의 동료를 꾸짖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예수님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간구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짧은 한마디에는 놀라운 믿음이 담겨 있다. 당시 예수의 모습은 왕의 위엄과는 거리가 먼, 처참하게 파괴된 패배자의 형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눈앞의 초라한 사형수에게서 영원한 나라의 주인임을 보았다. 주님은 그 순간의 믿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최고의 약속으로 응답하셨다.
이러한 선택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반복된다. 어느 한 목사님께서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와 함께 뜨겁게 기도하며 대입 합격을 기도하고 노력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낙방이라는 시련을 겪었다. 한 친구는 하나님께 실망하고 원망하며 교회를 떠났고, 세월이 흘러 사기죄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처지가 되었다. 반면, 다른 한 친구는 똑같은 좌절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신학의 길을 걸어 목회자가 되었다. 수십 년 후, 교도소 세례식장에서 두 친구는 집례자와 죄수로 다시 만나게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아리랑 고개'를 만날 때가 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몰아칠 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상황이 좋을 때가 아니라, 아리고 쓰린 고난의 한복판에서 증명된다. 십자가 위의 강도가 보았던 것은 고통 너머의 소망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며 가장 아리고 쓰린 길을 먼저 걸어가셨다. 그래서 그분은 누구보다 우리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주님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아리랑 고개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비록 지금은 눈물 어린 고개를 넘고 있을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자에게는 반드시 낙원의 기쁨이 예비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고난의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듯, 우리의 아리고 쓰린 삶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마침내 영원한 축복으로 변화될 것이다. /심영선 비래영광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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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