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
『삼국유사』의 서두를 여는 이 짧은 문장은 한민족 상고사의 출발을 증언함과 동시에, 이를 지우려는 세력과 지키려는 민족지성 간의 대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해당 한자를 환국(桓國)으로 보느냐 환인(桓因)으로 보느냐에 따라, 고대사가 문명사로 이어질지, 아니면 신화로 축소될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환국으로 해석하면 환인이 다스린 실존 국가에서 환웅의 배달국, 단군의 고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체계가 성립하지만, 환인으로 보면 국가 개념은 사라지고 신화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한 글자 차이'는 단순한 해석 문제가 아니라, 민족사의 정통성을 약화 시키려는 식민사관의 개입과 연결되어 있다.
13세기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1512년 정덕본(중종 임신본)으로 중간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되며 조선에서는 점차 잊혀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귀중한 사서로 주목받았고, 20세기 초 도쿄제국대학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1904년 츠보이 쿠메조가 정덕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석유환국(昔有桓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당시 일본 학계에서도 환국이 명확히 기록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다.
@이마니시류의 '환인' 덧칠 날조
이에 적잖이 당황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안정복이 소장했던 순암수택본을 일본으로 반출해 1921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영인 간행했다. 이 책도 역시 정덕본이 모본이기에 '환국 桓국(口큰입구 안에 王임금 왕)'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이마니시류가 환국이라 써 있는 부분에 덧칠을 가하여 환인으로 조작을 가한 것이다. 글자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날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민족의 정체성을 지우는 천인의 망필"이라 비판하며, 한 글자의 변조가 역사를 신화로 축소하는 교묘한 장치라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바꾸어 조작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환국(桓國)은 우리의 시원이며, 그 말 하나를 지우는 것은 정체성의 뿌리를 지우는 행위라고 경고한 것이다.
안정복의 잘못이라는 위서론자의 2차 환국 말살 시도
그런데 위서론을 주장하는 소설가 이문영은 '因' 표기를 이마니시 류의 개입이 아니라 순암 안정복의 가필로 돌리려 했다. 그는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이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바뀐 것은 이마니시류의 조작이 아니라, 순암수택본을 소장하고 있던 안정복이 덧칠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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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의 '환국'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가 '환인'으로 변조한 모습 (출처 : 환단고기 북콘서트) |
이는 이마니시 류가 순암수택본의 '환국'을 '환인'으로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강하게 덧칠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정황이다. 결국 안정복의 가필이라는 주장은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고, 이를 옹호하던 논리 역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최종 덧칠을 가한자는 조선총독부 산하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다. 덧칠한 자가 범인이다. 그 일본인 범인을 비호하려고 없는 얘기를 만들어 주장한 이는 친일파이거나 밀정이다. 조작이라도 해서 바꾸려고 애썼던 그 내용은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옛적에 환국은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이문영은 『한국스켑틱』 2026년 3월호에서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는 조선 중기 『삼국유사』를 판각하던 과정에서 한 각수가 '인(因)'의 이체자인 인(口 큰입구 안에 士 선비사)을 '국(口 큰입구 안에 王 임금왕)'으로 잘못 새기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오각(誤刻)이 후대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환단고기』 역시 이러한 오류에서 비롯된 '환국'이라는 허구적 개념 위에 세워진 기록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조선 시대의 엄격한 목판 인쇄 공정을 전혀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졸속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목판 인쇄는 '각수' 혼자 만드는 결과물이 아니다. 조선 시대 목판 인쇄는 단순히 각수가 나무를 깎는 과정이 아니다. 원고를 베껴 쓰는 필사자(서사관), 이를 검토하는 교정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판각을 감독하는 관리의 눈을 거쳐야 한다. 특히 『삼국유사』 같은 국가적 가치를 지닌 사서의 경우, 글자 하나가 갖는 무게감이 남다르다. 당시의 철저한 교정 시스템을 부정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름 없는 각수의 실수'라는 설명이 반복되는가. 그것은 이 문제를 가장 좁은 범위에서 봉합할 수 있는 해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책임이 필사자와 교정자, 나아가 판각을 감독한 체계 전체로 확장된다면, 이는 더 이상 한 장인의 단순한 오각 문제가 아니라 당시 문헌 전승 과정과 역사 인식 전반을 다시 따져야 하는 문제로 커지게 된다. 바로 그 점에서 '각수의 실수'라는 가설은 가장 손쉬운 해명일 수는 있어도, 가장 설득력 있는 해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환국 논쟁을 다뤄온 이강식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설령 기록에 '인(口 큰입구 안에 士 선비사)'이라 적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리키는 본래의 실체는 '국(國)'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전되던 '환국'의 기억이 불교적 소양을 지닌 일연의 해석을 거치며 '환인(제석)'이라는 신격적 개념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 역시 열려 있다.
결국 '환국이냐 환인이냐'의 문제는 단순한 오각이나 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과 전승, 그리고 사상적 해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된 역사 인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이전, 이미 '환국'은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간과되고 있는 사실은 『삼국유사』 정덕본의 판목에 '국(口 큰입구 안에 王 임금왕)'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판각상의 우연이 아니라, 그 시대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환국'이라는 역사적 기억이 문자로 정착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삼국유사> 자체와 환국을 기록한 이전 문헌들에 모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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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석유환국 , 삼성기 상에는 오환건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고려 말 원동중의 『삼성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과 함께 환인(桓仁)이 언급되며, 일곱 명의 환인이 계보로 나열되어 있다. 또한 "파나류지산하(波奈留之山下)에 유환인씨지국(有桓仁氏之國)"이라는 구절을 통해, 환국을 '환인씨의 나라'로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여기 등장하는 '파나류(波奈留)'라는 표기를 문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환단고기』는 18세기 일본 문헌에 보이는 '波乃留'의 '내(乃)'가 아니라, 고대 이두식 표기인 '나(奈)'를 사용하고 있어 7세기 이전의 고대 한국어 표기 전통과 부합한다. 이는 일본의 고대 지명 '나라(奈良)'와도 통하는 표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환단고기』와 『삼성기』가 후대의 임의적 조작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 표기 전통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나아가 이러한 표기는 이어지는 "유환인씨지국(有桓仁氏之國)"이라는 기록과도 맞물리며, 환인이 실재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들이 다스린 '나라' 역시 분명히 존재했음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설령 '석유환인'이라는 표기를 따르더라도, 그 안에서 환인의 존재와 더불어 '환인의 나라'라는 국가 개념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역사 해석이라 할 것이다.
『삼국유사』 정덕본 간행 이후 8년 뒤에 편찬된 이맥의 『태백일사』에서 인용한 <삼성밀기>에도 유사한 내용이 확인된다. 이 기록 역시 "파나류지산하(波奈留之山下)에 유환인씨지국(有桓仁氏之國)"이라 하여, 환인의 나라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그 강역에 대해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하나로 통칭하여 환국(桓國)이라 하고, 이를 나누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이국, 수밀이국 등 열두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이 <삼성밀기>는 환국의 말기, 즉 '환국지말(桓國之末)'에 이르는 과정까지 서술하고 있어, 환국이 단순한 관념이나 신화가 아니라 일정한 시기와 구조를 지닌 역사적 체계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진국 발해인이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조대기>를 보더라도 같은 맥락이 확인된다. 이 기록 역시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하여 환국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으며, 환인(桓仁)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떤 행적을 펼쳤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환인께서 오물을 기르고 오훈을 널리 펴며, 오사를 주관하여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단순한 신격이 아니라 통치 주체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와 관련하여 이강식 교수의 연구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는 『환단고기』와 『삼국유사』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곡(主穀)·주명(主命)·주병(主病)·주형(主刑)·주선악(主善惡)', 이른바 '오사(五事)'를 분석하며, 이를 단순한 관념적 가치가 아니라 실제 관명(官名)이자 조직 체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환국과 신시 시대가 단순한 부족 사회가 아니라, 각 기능이 분화된 통치 체계를 갖춘 국가 단계였음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환국의 존재를 전하고 있는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조대기>, <삼성밀기>와 같은 기록들은 과연 당시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단서를 우리는 『세조실록』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중략)....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이 기록은 단종이 죽임을 당한 세조 3년(1457년) 당시까지도 '환국(桓國)'의 역사를 전하는 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수서령은 일회성 조치에 그치지 않았다. 세조를 거쳐 예종,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서책을 은닉한 자에게는 엄벌을 내리겠다는 강력한 경고까지 내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서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수거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문헌이 민간에서 은밀히 보존되고 전승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1512년 중종 임신년에 간행된 『삼국유사 정덕본』 이전에도 '환국(桓國)'이라는 명칭은 이미 여러 사서에 널리 기록되어 있었다.
『삼국유사 정덕본』의 표기를 둘러싼 '환국'과 '환인' 논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 논쟁과는 별개로 '환국'이라는 인식 자체가 우리 고대 사서 전반에 분명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환인,환웅,단군 모두 인정하지 않는 우리 학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지우려 했던 이마니시 류 등 식민사학의 영향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역사학계에 잔존해 있다. 일부 학계는 『삼국유사』의 특정 표기를 근거로 『환단고기』를 후대의 조작물로 규정하고, 나아가 특정 인물의 주장을 앞세워 전체를 부정하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엄밀한 학문적 검증이라기보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은 채 이에 맞추어 근거를 끼워 맞추는 방식에 가깝다. 결국 이는 설득력 있는 비판이라기보다는, 논리적 정합성이 결여된 일방적 주장에 머무를 뿐이다.
환국이 아니라 환인이라면, 그에 걸맞은 역사 인식의 일관성부터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학계는 '환인'을 과연 인정하고 있는가. 환인을 신격으로만 축소하면서 그 역사적 맥락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삼국유사』는 환웅이 다스린 나라를 '신시'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름도, 통치 주체도, 내용도 분명한 이 기록을 두고서도, 과연 그 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환웅이 세운 신시는 아예 나라 이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환웅신시처럼 나라를 이렇게 완벽하게 기술한 세계 역사는 없다. 건국이념을 공식으로 표방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신시말구는 없다. 환웅이 뭐냐, 천왕이다. 천왕이 있는데 어떻게 나라가 없는가. 개국이념도 있다. 통치방식도 있고 조직도 있고 국호도 있는데 어째서 나라로 간주하지 않는가." (전 안동대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
이 지점에서 민속학자 임재해 교수의 문제 제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환웅의 신시를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깊은 의문과 안타까움, 나아가 강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해석의 차원을 넘어, 우리 고대사를 바라보는 주류 역사학계의 기본 전제 자체에 균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신시는 물론이고, 우리 역사학계는 환웅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신시'라는 명칭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 기록 자체를 역사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묻는다. 단군왕검은 과연 실존 인물로 인정하고 있는가. 단군기원, 곧 '단기'는 인정하는가. 올해가 단기 4359년임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의 기원조차 부정하는 것이 지금의 사학계 아닌가.
더 나아가 단기의 연대를 반으로 축소해 약 2700년만을 역사로 인정하고, 이를 교과서에까지 반영해 후대에 가르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떻게 일제 식민사학보다 더 독하고 집요하게 우리 뿌리를 부정하며, 스스로를 반도 사관의 좁은 틀 속에 가두려 하는가? 광복 8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 식민사학자들이 그어놓은 '역사의 마지노선'을 넘어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남긴 독초를 자양분 삼아 우리 역사의 지평을 스스로 도려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행태는 학문적 엄밀함이라는 가면을 쓴 채, 민족의 시원을 신화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두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실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추종하는 식민 사관의 왜곡된 논리에는 한없이 관대하지 않은가.
결국 문제는 '환국이냐 환인이냐'라는 문자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 상고사를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화로 축소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지금의 논쟁은 여전히 그 갈림길 위에 서 있다.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지켰던 환국(桓國)
지금 역사학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관을 모두 파괴하려 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환국'을 역사적 정통성의 기점,국통맥의 출발점으로 복원하려고 했고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은 이를 '환인桓因'이라는 신격으로 대체하며 역사 없는 민족으로 만들고자 했다. 결국 '석유환국'이냐 '석유환인'이냐는 단순한 필사 오류나 문자 논쟁이 아니다.
1936년 8월 29일 한국독립당은 제26주년 국치일(國恥日)에 발표한 선언문에서 "환국에서 삼한이 끝나기까지 무릇 3천여 년, 삼국(신라, 고구려 , 백제)에서 신라 말까지 무릇 1천년, 왕씨 고려로부터 이씨조선까지 각각 5백여년 지속되어 모두 5천년이다."라고 하였다.
한국독립당 당강해석黨綱解釋 초안(1941. 11 이후)에서 임시정부의 최고 이론가였던 조소앙 선생은 대한민국을 왜 한국韓國이라고 결정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하고 있다.
"첫째로 삼국유사 첫 꼭대기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하였습니다. 환국(桓國)과 한국(韓國)은 역자(譯字)의 부동(不同)인 것뿐이며 우리 말로 「한 」은 「하아 」 「한울 」 「크다 」는 3대 의미가 있어 민족칭호 및 국가칭호의 원시적 일원화한 위적(偉跡)이 있고 환은 광명(光明)이니 후세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유전이 이에서 발원한 것입니다"
1942년 공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3주년 3·1절 선언문>에도 우리 민족의 시작은 환국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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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2년 3.1절 선언문에 기록된 환국(桓國) (출처 : 환단고기 북콘서트)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에 실린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한국의 첫 국가를 고조선이 아닌 환국이라고 인식한 것은 민족사학의 관점일 뿐 아니라 임시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을 세운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우리 역사의 시작은 환국'이라는 인식은 특별한 주장이 아니라 상식에 가까운 역사 인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렵게 지켜온 역사를 오늘날 우리는 점점 잊어가고 있다.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이 기록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의미를 직시하고,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역사 인식을 후손에게 온전히 전해야 할 때다.
역사의 주인은 기억하는 자들이다
『삼국유사』 정덕본이 증언하고, 『삼성기』와 『조대기』가 뒷받침하며, 『세조실록』의 수서령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단 하나다.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이 기록은 결코 어느 이름 모를 각수의 실수로 만들어진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오늘 다시 '환국'을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라진 고대국가의 환상을 좇기 위함이 아니다. 식민사관이 훼손한 민족사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잃어버린 한국인의 정체성과 자존을 되찾기 위함이다.
환국은 단순히 문헌 속에 남아 있는 한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이어져 온 '광명(桓)의 역사'이며, 시대를 넘어 전승된 인식의 흔적이다. 잃어버린 '환국'을 복원하는 일은 과거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식민의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의 역사 인식을 다시 바로 세우는 일이다.
역사는 기록인 동시에 정신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그것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는다. 역사의 주인은, 결국 그 역사를 끝까지 기억하고 다시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석유환국"이라는 이 기록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직시할 것인가.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알려야 한다. 환인 천제가 건국한 나라 환국을,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서 바로 세워 후손에게 온전히 전해야 할 때다.
박찬화 (사)대한사랑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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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