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 여성들이여, '오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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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여성들이여, '오만'하자

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승인 2021-11-08 11:03
  • 신문게재 2021-11-09 18면
  • 김소희 기자김소희 기자
김명주 충남대 교수
김명주 충남대 교수
난 '겸손'이라는 말이 싫다. '겸손'하고 싶지도 않다. '겸손'을 미덕으로 사회화했던 윤리관과 도덕률에 강력히 저항한다. '겸손'의 미덕화는 인간을 노예화하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다. 지배층은 '겸손'을 인간의 미덕으로 떠받들면서 지배층에 유리한 체제에 피지배층이 나긋나긋 순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야 귀찮은 저항 없이 대대손손 지배층의 지배력을 확보할 터였다.

유독 여성에게 더욱, '겸손'은 미덕으로 미화되고 강요되었다. 남성이 권력을 소유하는 가부장제에서 남성 지배층은 여성 피지배층 집단에 '겸손'을 미덕으로 이데올로기화했다. 겸손한 여자는 사회적으로 이상화되고 추앙받았다. 인류 인구의 반을 나긋나긋한 순응자로 노예화함으로써 대대손손 지배층 남성들이 특혜를 누릴 심산이었으리라.

나긋나긋하지 않은 소위 '오만'한 여성들, 자신의 유능함을 숨기지 않았던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박해받았다. 중세 유럽 약초에 능했던 여성들은 당시 새롭게 출현하던 남성 중심의 의학 비즈니스를 방해했기에 마녀로 죽임을 당했고, 체제에 저항했던 여성 자유사상가들도 체제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시대를 앞섰던 유능한 우리 여인들, 허난설헌과 나혜석도 여성의 유능을 '오만'으로 박해하는 시대인지라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메리 데일리가 지적하듯이, 성에 따라 위계를 결정하는 성적 카스트(sexual caste)는 상당 부분 종교 이데올로기 탓이다. 여성에게 유독 '겸손'의 미덕을 강요하는 현실도 일부 종교의 영향 탓이 크다. 기독교 역시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라는 글귀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광활한 신비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 도그마, 성직에 대한 순종으로 호도했다. 무조건적 순종과 겸손의 강요는 비판적 성찰력을 마비시켰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유독 여성에게 '겸손'을 강요했을까? 신학자 터툴리안에게 "여성은 악마의 문"이었고, 아퀴나스에게 여성은 "잘못 태어난 남성"이었고, 바르트는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남성에 종속되며, 남자는 머리"라 했고, 본회퍼 역시 "여성은 남편에게 종속된다"고 했다. 두고두고 영향력 있을 신학자들이 여성을 능멸했으니, 소위 주제 파악에 능한 여성이라면 마땅히 겸손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여성에 대한 종속과 능멸에 근거한 '겸손'의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다. 여성과 남성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파트너 관계다. 신과 인간이든, 남성과 여성이든, 주종관계에 근거한 '겸손'을 거절한다. 차라리 '오만'하자. 광활한 무한 앞에서 인간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고 취약해지지만, 동시에 내가 광활한 무한에 속할 뿐만 아니라 무한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인간 존재를 무한히 확대시키기도 한다. 무한과 연결된 존재인 여성은 당당히 '오만'할 권리가 있다.

우리네 전통 윤리에서도 '겸손'은 미덕이고 오만은 최악이다. '오만'이라는 말 자체에 사실 타인을 무시하는 성향이 함축되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을 실천한답시고 나를 낮추다 못해 아예 흔적도 없이 자신을 파괴해야 할 바에는 차라리 '오만'을 미덕으로 제안한다. 나를 낮추는 대신, 나를 높이고, 나를 인정하고, 나를 칭찬하고,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미덕으로서의 '오만'이다. 남을 무시하지 않는 '오만'이다. 내가 의미하는 '오만'은 자아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소중함도 인정하는 '오만'이다. 여성들이여. '오만'하자. '겸손'이라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여성 자신을 부정해야 했던 굴욕의 역사를 종식시키자. 오만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자. 자아가 굳건해야 비로소 타인과 파트너 관계가 가능해진다. 건강한 파트너 관계를 위해 우리는 '오만'해질 필요가 있다. /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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