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집 수옥.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이 집은 1994년 조순덕(72세)할머니가 딸의 이름인 '수옥'이라는 상호로 문을 열어 지금은 딸인 김수옥(52세)대표 까지 2대에 걸쳐 운영 중이다.
이 집을 공주 올 때마다 세 차례나 들르며 이 집의 메뉴를 다양하게 맛을 봤다.
메뉴마다 나름 각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우선 양념장에 찍어 먹는 두부는 잘 익은 묵은김치를 깨끗하게 빨아 볶아 낸 김치와 함께 입에 넣으니 부드럽고, 고소하니 입안을 호사스럽게 한다.
생두부를 먹을 때 특유의 콩 냄새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기름에 튀기거나 굽게 되면 콩 특유의 냄새가 덜 난다.
노릇하게 부쳐 나오는 부침 두부는 겉은 약간 크리스피하면서 속은 부드러운 식감과 은은한 들기름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침샘을 자극한다.
다만 손님이 주문하면 부치기 시작하니 약간 시간이 걸리는데, 9,000원에 6쪽이 나오는데, 사실 이 집에서 와서 이 부침두부를 안 먹고 가면 두고두고 서운할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 먹고 갔기 때문에 이번 맛있는 여행에서는 시켰다가 시간이 오래 걸린다하여 생두부만 먹고 왔다.
그리고 순두부찌개를 시켰는데, 순두부와 바지락을 넣고 고춧가루가 들어간 약간 맑은 탕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맛을 보니 국물이 시원하고 깔끔하며, 고소하니 담백한 두부 맛이 도드라진다.
찰지고 고소한 두부 그리고 낙지와 주꾸미가 들어간 순두부 전골은 푸짐한 느낌이 든다.
얼큰하면서 깊은 맛이 있는 육개장 순두부는 술 마신 후 해장을 하는 분들께는 추천할만한 메뉴다.
메뉴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은 정성과 맛이 스며들어 있다.
식사를 하고 이 집 안마당에 들어서니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눈에 띈다.
바로 두부하는 곳이다. 두부를 짤 때 걸쳐 놓는 나무삼바리를 깨끗이 닦아 걸러 놓고 콩을 물에 담가 놓았다.
생 두부.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순두부집 수옥이 있는 이인면은 사실 필자의 고향집과 가까운 동네다.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고개를 넘으면 이인면이라 어렸을 적에는 자주 놀러 오던 곳이다.
한국전쟁 직후 소년기를 지낸 필자는 두부를 보면 "두부 사려!"라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딸랑! 딸랑!"하는 손 종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옛 공주에는 이런 장수 소리가 새벽과 밤에 꼭 들렸다.
새벽에는 두부장수와 생선장수가 외치는 소리, 야심한 밤에는 "아사히 모찌나 당꼬~~~"라고 외치는 찹쌀떡 장수소리다.
물론 한여름에는 '어름과자'시대가 조금 지나 아이스케끼 장수의 소리가 어김없이 들렸다.
특히 두부장수는 전국 도시마다 있었던 것 같다. 1925년 8, 5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평양부내에 있는 두부행사 16인은 지난 2일 부터 동맹파업을 하였는데, 파업한 이유는 평양신사(平壤神祠)가에 있는 두부 집은 조선사람 두부 집과 일본사람 두부집이 열네 집인데, 종전에는 주인 측과 행상 측의 계약이 두부 매상고의 30%를 행상인의 수입으로 하였던바 지난 1일부터는 두부한모에 칠전(七錢)하던 것을 팔전(八錢)으로 올렸음으로 얼마 팔리지도 않고 매상고의 30%를 행상인의 계산으로 하드라도 하루에 50전(五十錢) 수입밖에 안 되는 것을 매상고에 25%를 행상인의 수입으로 하였으므로 도저히 생활비를 얻을 수 없다하여 그와 같이 동맹파업을 하였다더라.' 행상인 즉 두부장수들의 폭리 때문에 평양부의 두부집들이 파업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1962년 6월 24일 자 조선일보 서울시 경찰국이 새벽의 두부장수 종소리 등 주택가 행상(行商)들의 소음을 일제 단속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의 아침잠을 방해하고 학생들 공부에도 지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조선일보 1962년 6월 24일자). 수십 년간 아침을 열어 온 친숙한 '딸랑딸랑' 소리를 금지하는 것에 대해 언론의 견해는 엇갈렸다. 한 신문은 독특한 이유를 내세워 경찰을 비판했다. '시경(市警)의 단속이 시민들 늦잠을 보호해 주는 결과가 되면 곤란'하다며 건강을 위해 '좀 더 일찍 일어나 아침 공기 마시며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쓴 것이다. 두부장수 종소리가 일종의 '기상나팔'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두부장수 종소리는 사라져갔다. '한가하게 종을 흔들며 지겟짐 두부장수를 하다간 딱 굶어 죽기 십상'인 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80년 4월 23일 자).
순두부찌개.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냉장고도 없던 시절 집안 텃밭은 지금의 마트 역할을 했고, 새벽에 들리는 두부장수소리와 생선장수 소리에 맞춰 대문 밖 신작로에 나가 두부나 명태, 꽁치 등을 사 하숙하는 학생들의 식사와 도시락 까지 싸셨다.
어머니는 두부장수와 생선장수소리가 나면 나나 남동생에게 돈을 쥐어 주며 나가서 두부 몇 모 꽁치 또는 아지 등 몇 마리를 사 오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은 생선장수 소리도 두부장수의 종소리도 안 들린다.
당시 공주는 뽕나무가 많았고, 밭에 콩 농사를 많이 졌던 것 같다.
가을이면 이집 저집 마당에서 콩 바심을 하는 도리깨 소리가 난다.
콩 바심이 끝나면 어머니는 집에서 두부를 직접 하셨는데, 불려 두었던 대두(大豆)콩을 맷돌에 갈아 베보자기에 짠 콩물을 끓이다 간수를 치면 하얗고 몽글몽글한 두부 꽃이 피기 시작한다.
두부 하는 날 어머니는 이 두부 꽃 한 그릇씩 사발에 담아 먹으라고 주셨다. 순두부집에 가서 순두부를 먹으면 어렸을 적 두부 꽃 한 그릇씩 먹던 생각이 나 침을 꼴깍 넘길 정도다.
이 두부 꽃이 지금 '순두부'라 불리는 '초두부(初豆腐)' 또는 '수두부(水豆腐)'라는 것이다.
천 보자기 속에 넣고 약간 눌러서 수분을 조금 제거하여 굳힌 것을 '연두부', 제대로 눌러서 수분을 많이 제거하여 단단하게 굳힌 것을 '막두부'라고 했다.
부침 두부.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두부는 곡채식을 주로 했던 우리에게는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최상의 음식이다.
고려말 대학자이며 문신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 ~ 1396)은 "菜羹無味久(채갱무미구)오랫동안 맛없는 채소국만 먹다 보니, 豆腐截肪新(두부절방신)두부가 마치도 금방 썰어낸 비계 같군, 便見宜疏齒(편견의소치)성긴 이로 먹기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 眞堪養老身(진감양노신)늙은 몸을 참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라고 하였다.
목은(牧隱)선생은 유독 두부를 즐겨 드신 것 같다.
두부를 예찬하는 시가 많다.
"豆腐油煎切作羹(두부유전절작갱)기름에 두부 튀겨 잘게 썰어서 국을 끓이고, 更將蔥白助芳馨(갱장총백조방형)여기에 다시 총백을 넣어서 향미를 도와라"라는 시를 보면 두부를 기름에 튀겨 국을 끓여 파를 넣은 두부국을 만들어 먹었고, 관악산 신방사(新房寺) 주지(住持) 무급(無及)에게 만두와 부침두부를 대접 받고 쓴 씨를 보면 "檀越齋僧是故常(단월재신승시고상)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 山僧饗俗可驚惶(산승향속가경황)산승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넘어질 만, 饅頭雪積蒸添色(만두설적증첨색)흰 눈처럼 쌓인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 豆腐脂凝煮更香(두부지의자갱향)기름이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라고 주지스님에게 대접 받은 만두와 두부요리를 극찬을 했다.
위 시를 보더라도 고려시대 이미 우리는 두부를 만들어 먹었으며, 이 두부를 이용해 다양한 두부요리를 해 먹었던 것이다.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인 서거정 (徐居正, 1420년~1488년)은 윤 상인(允上人)이 두부를 보내 준 데 대하여 "餉來豆腐白於霜(향래두부백어상)보내온 두부는 서리 빛보다도 더 하얀데, 細截爲羹軟更香(세절위갱연갱향)잘게 썰어 국 끓이니 연하고도 향기롭네 耽佛殘年思斷肉(탐불잔년사단육)부처 숭상한 만년엔 고기를 끊기로 했으니, 飽將蔬筍補衰腸(포장소순보쇠장)소순(蔬筍) 즉 죽순이나 많이 먹어 쇠한 창자를 보하려네"-『사가시집(四家詩集)』제40권- 라고 윤상인에 대한 고마움과 불교 신도로서 고깃국 대신 두부국을 먹었다는 내용의 시다.
그뿐 아니다.
물에 담긴 대두콩.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명(明)나라 5대 황제 선덕제(宣德帝, 1399년~1435년)는 조선 여인들이 만든 두부를 즐겨 먹었던 것이다.
工曹判書成達生, 在中朝報공조 판서 성달생(成達生)이 명나라에서 보고했다.
"使臣白彦, 使執饌女, 造酒果豆腐以進, 帝甚嘉之, 卽除彦御用監小監, 賜冠帶.사신 백언(白彦)이 찬녀(饌女)를 시켜 술·과일·두부(豆腐)를 만들어 올리니, 황제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겨 곧 백언을 어용감 소감(御用監小監)으로 제수(除授)하고 관대(冠帶)를 내려 주었습니다." 39권,-『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10년(1428년) 2월 11일이라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사신을 따라간 요리사가 조선식 두부를 만들어 선덕제(宣德帝)에게 올리자, 선덕제가 그것을 맛보고 크게 감탄하여 사신에게 벼슬까지 내렸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조선 중기의 학자 죽소(竹所) 권별(權鼈, 1589~1671)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두부(豆腐)를 읊은 시에, "破黃雲雪水流연파황운설수류)누른 콩을 맷돌에 가니 눈 같은 물이 흐르고, 揚湯沸鼎火初收(양탕불정화초수)가마솥에서 펄펄 끓으니 불을 비로소 거둔다. 凝脂濯濯開盆面(응탁탁개분면)기름이 엉겨 번드르 한 동이 뚜껑을 여니, 截玉紛紛滿案頭(절옥분분만안두)옥같이 자른 것이 쌓여 밥상에 가득하다."조선 중기 두부 만드는 법을 간략하게 표현한 시다.
오랜 역사를 통해 그 명맥이 이어져 온 두부지만 중국이나 일본처럼 다양하게 발달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수옥의 두부 맛으로 위안을 삼는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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