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칼럼] 격쟁, 조선의 민원은 북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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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人 칼럼] 격쟁, 조선의 민원은 북소리였다

최정민 미술평론가

  • 승인 2025-11-05 17:21
  • 신문게재 2025-11-06 19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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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누군가는 국민신문고에 글을 올리기까지 망설인다. 삭제하고, 다시 쓰고, 전송까지의 과정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제도에 대한 반응이자 참여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불편을 호소하지만, 조선시대 백성들은 붓과 종이, 때로는 징과 북을 두드리며 사정을 전달했다. 그중 가장 극적이고 이례적인 방식이 '격쟁(擊錚)'이었다.

격쟁은 조선시대 백성들이 국왕의 행차 앞을 막고 징이나 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던 방식이다. 관청 절차가 무력화됐을 때 선택된 이 비정상적 경로는, 제도로 해결되지 않는 사안에 대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말로 닿지 않는 상황에서, 물리적 행위로 응답을 요구한 셈이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화성능행도≫의 <시흥환어행렬도>에는 정조의 어가가 시흥행궁에 들어서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줄지어 선 백성들의 모습은 행렬의 질서와 함께, 권력과 백성 사이의 물리적, 정치적 거리감을 시각화한다. 일부는 징이나 꽹과리를 들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장면은 제도 밖 목소리가 어떻게 장면화됐는지를 보여준다.

격쟁은 제도적으로 자유롭지 않았다. 조선 전기부터 존재했던 이 행위는 1560년(명종 15), 궁궐 내 격쟁을 금지하며 금령 대상으로 지정되었고, 정조가 즉위한 1777년에는 행차 외곽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는 호소를 막지 않으면서도 국왕 권위와 행정 통제를 유지하려는 조치였다. 표현의 권리는 인정되었지만, 경로는 정교하게 통제되었다. 격쟁은 허용과 금지, 권리와 통제를 오가며 조선시대 민원 구조의 이중적 성격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격쟁을 통해 제도 개선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중종연간, 격쟁이 수령의 부정과 폭정을 호소하자 즉시 조사를 진행하여 파직을 명했고, 숙종은 과세를 조정했으며, 정조는 이를 제도화해 직접 민원을 듣고 관리를 심문하기도 했다. 이는 격쟁이 행정의 한계를 보완하고, 경직된 제도를 뚫는 사회적 안전장치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교적 통치 철학과도 맞닿아 있

다. 조선은 '백성의 말에 귀 기울이는 군주'를 이상적 통치자로 삼았다. 격쟁은 그 이상을 구현하려는 시도이자, 민의를 통제 가능한 형식에 가두려는 장치였다. 듣는 듯하지만, 듣는 방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백성의 목소리는 국왕에게 닿을 수 있었지만, 그 문은 선택적으로만 열렸다.

당시에는 말이 아닌 글로 전하는 민원 방식도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문서 형태의 '소지(所志)'다. 소지는 백성들이 작성한 소송, 청원, 진정서로, 당시 표준화된 민원 형식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민신문고에 해당하는 행정 창구였다. 이는 행정 감시이자, 백성과 국가 사이의 소통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문해력이 부족한 백성은 대필을 요청했고, 소지 하단에는 '아전이 대신 써줌'이라는 주석이 붙었다. 민원은 개별 요구이자, 다수가 활용한 일상적 통로였다.

오늘날 민원은 디지털 체계에서 작동한다. 국민신문고에 남겨진 문장은 단지 불편을 알리는데 그치지 않고, 제도가 어떻게 응답하고 말을 건네는지를 보여준다. 민원은 제도의 맹점과 균열을 포착하고, 체계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침묵하는지를 드러내는 사회 진단 도구다. 조선시대의 격쟁이 권력 외곽에서 울린 예외적 호소였다면, 오늘날 민원은 제도 내부로 편입된 공식 항의 형식이다.

격쟁, 소지, 디지털 민원은 시대는 달라도 모두 제도의 틈에서 발생한 응답이다. 공공 게시판에 남겨진 한 문장은 사회 구조의 긴장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북을 울리던 손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은 다른 도구를 들었을 뿐,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또 다른 형태의 격쟁을 수행하고 있다.

최정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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