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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천 교수 |
이를 통해 사림파는 성리학적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 도학 정치를 실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강화해 나갔다. 전자의 대표적인 학자가 조광조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학자가 김안국이다. 즉, 조광조는 중앙 정치에서 훈구파들과 겨루면서 정치적 개혁을 꾀했다면, 김안국은 향촌에서 향약으로 일상생활의 윤리 규범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함으로써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조광조와 김안국은 김종직과 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로서 사림파의 선도자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이 중 김안국은 1478년(성종 9)에 태어나 26세 되던 해인 1503년(연산군 9)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중종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숙청되고 이를 두둔한 김안국은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지만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으로 낙향하여 지냈으며, 1537년(중종 32)에 복권되어 이후 예조판서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3년(중종 38)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안국의 학문 활동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그가 관찰사로 있으면서 향촌 교화에 힘을 쏟은 부분이다. 특히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중종은 풍속을 교화시킬 것을 하교하였다. 이에 김안국은 경상도 지방의 사림 30여명을 천거하여 지방 사림이 등용되는 현량과 실시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향교의 유생들에게 『소학』 공부를 권면하고 그 보급에 힘썼다.
무엇보다 김안국의 학문에서 돋보이는 것은 성리학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일반 백성들에게 유교의 덕목과 윤리를 가르쳐 민심과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교화서를 간행한 일이다. 그는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 곧 이륜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 48명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 언해한 『이륜행실도』를 간행하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덕과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여 도덕심을 함양하는 데에 지켜야 할 덕목과 규범을 정한 『여씨향약』을 번역하여 『여씨향약언해』와 향촌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정속언해』 등의 교화서를 간행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나아가 김안국은 중종의 명을 받아 온역(돌림병)을 치료하는 방문을 모아 『본문온역이해방언해』를 간행하였으며, 그 외에도 전하지는 않지만 농서나 잠서 등을 언해하여 간행하였다. 즉, 김안국은 성리학만 학구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향약을 통해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사람이었고 농학과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천문과 병법 외에도 종이 제작법도 개발할 정도로 이론과 실제에 다재다능한 위인이었다.
특히,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중에 향촌 사회의 교화를 위해 『이륜행실도』를 편찬하면서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을 가족과 친족의 범위를 넘어 향촌 사회에서도 필요한 윤리임을 강조하였다. 즉, 『이륜행실도』에서 구현된 장유와 붕우의 윤리에는 혈연과 지연을 넘고 학문을 매개로 한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혁신적인 윤리의 지향은 『여씨향약언해』의 간행으로 경상도에서 시행된 지 2년 만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까지 확대 시행되었으니 공동체의 사회적 질서와 관계가 국가에 의한 정책이 아닌 김안국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을 정도로 김안국은 당시 많은 사림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김안국의 향촌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실천은 이언적, 이황, 김인후 등으로 이어지면서 훗날 영남학파의 근간을 마련케 하였으며, 특히 이황이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기반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김안국은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실천한 유학자였으며, 일반 백성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아 한글 교화서를 간행한 계몽가였으며, 과학 기술에도 비상한 지식을 가진 경세치용의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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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