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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우 전 계룡용남고 교장, 문학박사 |
하나는 성암 이철영 선생(1867∼1919)이 말한 '사불응(死不應)'이고 다른 하나는 매헌 윤봉길 의사(1908∼1932)가 말한 '생불환(生不還)'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전자는 비폭력 저항운동의 일환이고 후자는 총칼의 힘에서 나오는 무력투쟁이다.
사불응(死不應)은 《성암집》의 <부풍옥중일기> 에 나오는 말로 죽어도 일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고착화하려는 신민화 정책에 따르지 않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고문으로 인하여 성암은 5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불환(生不還)은 윤봉길이 학교 수업을 거부하고 한문교육과 농촌 계몽운동에 힘쓰다가 미진함을 자각하고 1930년 중국으로 향하면서 대장부는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 生不還]는 결의를 담은 말이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이 해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항일운동의 두 가지 측면을 필자는 몇 번 강조한 바 있다. 한 부류는 비폭력 불복종으로 일제에 항거한 것이다.
이들의 평생의 심적 고통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절하였다.
다른 부류는 총칼과 무력으로 일제에 맛서 싸운 일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도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 것이다.
비폭력 불복종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성암 이철영이다.
세계적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대명사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이다.
성암은 간디 보다는 2년 연상의 나이였지만 간디 보다 몇 배나 강렬하게 불복중하는 족적을 남겼다.
꼿꼿한 선비로서 죽어도 일제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사불응 행동을 펼쳤다.
일제는 1909년 민적법을 공포하고 호적 편입을 강요하였다.
조선의 백성을 일본의 백성으로 등록하고 수탈을 강행하려는 정책이었다.
이에 성암은 일본에 <치일국정부서, 재치일국정부서>라는 편지를 보내 호적신고 정책의 부당성을 개진하고 일본 신민으로의 편입을 거부하였다.
차라리 죽어서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어 토지 신고를 거부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온갖 농지와 산판을 빼앗겼다.
묘적 신고를 거부함으로써 조상의 묘소가 파헤쳐질 수도 있다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신문물을 거부하여 평생 철도와 우편을 이용하지 않았고 한복 옷차림을 하고 갓을 쓰고 출입하였다.
또한,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응하여 인력동원, 문패달기, 부역 등의 행정에도 거부하였다. 거부에 따른 벌금 납부도 거부하였다.
돈이 산같이 있더라도 조선 백성이 일본 기관에 금전을 납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감옥에 투옥되면서 일본 관리의 호출·소환·출석 요구에 불응하였다. 갓을 쓴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포승줄에 묶여서 잡혀갈지언정, 자발적으로 걸어서 일본 관청에 가는 일은 없었다.
불응의 대가는 혹독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곤욕을 당했다. 기유년(1909), 경술년(1910), 갑인년(1914), 무오년(1918)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죽기로 맹세한 그때의 고문, 협박, 회유당한 일을 <기유일기>, <경술일기>, <갑인일기>, <무오일기>로 기록하였다.
이 글이 묶여서 <부풍옥중일기>로 전한다.
총칼을 지닌 힘으로 일제에 대항한 대표적 인물은 바로 매헌 윤봉길 의사다.
안중근, 이상설, 김좌진, 지청천, 홍범도, 이봉창 의사 등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한용운, 유관순, 김구와 같은 인물과 친일파가 아닌 일반 백성들은 비폭력적인 항일운동에 가까운 인물들이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매헌은 25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천추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영웅이다.
11세에 예산의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3·1 운동의 영향으로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배척하고 자퇴하였다.
이어 사서삼경 등 한학을 섭렵하였다
야학당을 세우고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매헌은 이러한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른다.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기면서 고향을 떠난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자세야말로 바로, 매헌 윤봉길의 진면목이다.
매헌은 평안도에서 투옥과 석방 등의 고초를 겪고 천신만고 끝에 만주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의 간절한 염원을 공감하였다.
일왕의 생일 축하 및 상해 점령 전승 기념일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응징하고 중국과 나아가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 열망 뜻을 각인시켰다.
매헌은 현장에서 체포되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끌려갔다.
매헌은 상하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오사카로 압송되었으며 그 해 순국했다.
해방 후 1946년 유해가 봉안되어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슬프게도 생불환이라는 말처럼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죽어서 가정과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매헌의 의거는 단순한 개인적 행위가 아닌 민족의 역사를 바꾸고 세계에 경종을 울린 침략자에 대한 징벌의 위대한 행동이었다.
이 의거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해냈다."며 경탄했다.
이후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生不還]는 매헌은 순국하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너희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다면 조선을 위하여 반드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버지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라는 유서를 남겼다 하니 그 정신에 숙연해진다.
사불응과 생불환이야말로 우리나라 항일운동의 처절한 역사이며 숭고한 희생정신의 발자취이다.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고자 했던 애국지사들의 위대한 정신문화이다.
이와 같이 처절한 정신문화야말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강국의 반열에 드는 발전의 기폭제요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생불환한 의사들의 의거는 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사불응과 같은 방식의 의거는 묻히는 아쉬움이 있다.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전 국민이 유언무언으로 임했던 사불응이야말로 함께 빛나야 하는 고귀한 정신문화이다.
성암 선생의 사불응이야말로 이러한 운동이 대표적으로 일기 속에 전하는 문화유산이다.
왜 일제는 이렇게 처절하게 사불응하는 성암을 단칼에 처치하지 못하고 그냥 속만 썩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친일파들을 제외한 전 국민에 아로새겨진 반일정신이 들불처럼 번져서 제2, 제3의 매헌과 같은 생불환의 의거가 만주로 중국 전역으로 나아가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부정과 부조리 불공평에 야합하지 않는 사불응이나 정의와 공정을 위해 자신 몸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생불환은 모두가 소중한 정신적 가치이다.
이러한 자산을 소유한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로 간절하고 절실한데 스포츠 선수나 과학 연구자가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최근, 남서울대학교 충남의병연구센터에서 의병활동의 시대별, 사건별, 인물별 디지털화 작업을 준비한다고 하니 기대되는 바가 크다.
이석우 전 계룡용남고 교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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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