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는 1880년 충남 대덕군 내산면 어남리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고 26세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을 지냈고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맡았다. 단재의 글은 위태롭게 기울어가는 대한의 국민들에게 크나큰 울림이 되었다.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채호가 쓴) 신문의 한 줄 글이 조선인들을 더 격동시킨다'며 두려워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탄하자 단재는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북경의 대학교 도서관과 서점을 다니며 역사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35세인 1914년 조선사 집필에 착수하고, 고구려 옛 땅과 광개토대왕릉을 답사하였다. 52세가 된 1931년 마침내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였다. 그리고, 1936년 2월 21일, 57세의 나이로 여순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 지친 몸을 누이고 순국하였다.
대통령의 '환빠' 발언으로 '환단고기 진위논쟁'이 다시 불붙은 지금, 우리는 왜 단재의 역사관을 돌아봐야 하는가? 단재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나(我)'는 곧 '우리(吾)'이며, 역사문화 귀속체인 '조선 민족'이다. 그는 "조선사란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나와 우리, 곧 조선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단재는 '하늘처럼 환한 빛의 나라 환국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의 밝은 땅 조선으로 나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역사인식은 『환단고기』와 닮아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桓)'은 '환국', '환하다'는 '환'이고, '단(檀)'은 '박달', 즉 '밝은 땅'을 뜻한다. 다만, 『환단고기』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와 같이, 환국에서 동방으로 온 환웅천왕의 '신시(神市)'를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기록했지만, 단재는 신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대종교 역사관의 영향으로 '신시'를 생략한채 '단군조선'을 조선 민족의 첫 나라로 서술했다.
단재의 역사 연구에서 불멸의 업적 중에 하나는 '북삼한', 즉 '전삼한'의 실체를 밝힌 것이다. 학계에서는 '대한(大韓)'의 기원인 '삼한(三韓)'을 지금의 한강 이남에 위치했다는 남삼한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단재는 『고려사』 김위제전에 인용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단군조선에는 삼경(三京)이 있어서, 세 곳의 수도에 세 명의 단군 즉 '한(韓)'이 주재하였으며, 신한(진한)의 大단군이 불한(번한)과 말한(마한)의 小단군을 통솔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정치제도인 '삼한오가(三韓五加)'는 우주의 정치조직인 '삼신오제(三神五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삼한오가(三韓五加)는 환웅천왕의 삼백오사((三伯五事)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미 환국에서 기원한 신시시대부터 제도화되었던 것이다. 이를 『환단고기』「단군세기」에는 '단군왕검께서 신시의 법도를 되살리셨다(檀君王儉 復神市舊規)'라고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단재의 『조선상고사』에는 『환단고기』에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역사기록과 유사한 내용들이 있다는 점이다. 단재가 단군조선 최대 사건이라 했던 '삼조선 분립'과 '고구려 900년'설, '단군왕검의 부루태자가 9년 홍수에서 하우(夏禹)에게 전한 금간옥첩', '왕문의 이두법', '단군연대의 고증'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큰 틀에서는 『조선상고사』와 『환단고기』의 기록이 같아 보이지만, 단재의 역사서술과 논증은 『환단고기』 기록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고주몽의 4대조 혈통이 기록되어 있지만, 단재는 광개토대왕비문을 분석하여 주몽의 선조 4대가 더 있다는 것을 밝혔고, 『삼국사기』의 가언충 비기(?記)를 근거로 '고구려 900년 설'을 논증하였다.
이외에도, 「단군세기」에는 '기후가 번조선 70대 왕이 되었다'고 기록된 반면에, 단재는 기자의 후손에 대해서 구체적인 서술을 하지 않았다. 또한, 「태백일사」에는 삼조선 분립 시점을 '44세 구물 단군 때'라고 기록하였으나, 단재는 『사기』와 『관자』 등 차이나 사서에 '신·말·불' 세 조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 시점을 추정하였다.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환단고기』 해설서' 혹은 '이해를 돕는 필독 참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일항쟁기 독립운동가들이 되찾고자 했던 역사관과 『환단고기』의 기록은 놀랍도록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모방해서가 아니다. 두 곳이 모두 우리 고대사의 '진실'이라는 하나의 뿌리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 『舊삼국사』를 비롯하여 조선 중기까지 여러 문헌에 인용된 고유 사서의 역사계보가 『환단고기』의 국통맥(國統脈)과 부합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 서거 90주기를 맞이하는 올해, 그가 목숨 걸고 전하려 했던 역사의 진실은 『환단고기』와 맞닿아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환단고기』를 연구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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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 중구 신채호 선생 생가터의 신채호 조각상 |
박덕규 융합고고학 전공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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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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