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칼럼] 대전 '노잼'에서 '다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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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人칼럼] 대전 '노잼'에서 '다잼'으로…

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 승인 2026-06-17 16:48
  • 신문게재 2026-06-18 19면
  • 최화진 기자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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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잼(Jam)'이라는 단어는 묘한 질감을 가졌다. 본래 신선한 과일을 설탕과 함께 오래 끓여 만든 달콤한 보존식이지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재미'를 줄인 발랄한 언어로 더 자주 쓰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두 의미는 닮았다. 도시의 문화도 숱한 이야기와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달콤하고 쫀득한 '잼'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대전은 '노잼 도시'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행정과 연구 중심의 정적인 분위기 탓이었는지 모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볼 것도 즐길 것도 마땅치 않다는 말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반쯤 농담처럼 오가던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 대전의 거리를 걷다 보면 그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다채로운 잼의 향기가 도시 곳곳에 배어 나오고 있다.

그 선두에는 단연 '빵잼'이 있다. 전국구 명물로 자리 잡은 빵집들을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 어귀에 늘어선 줄, 갓 구운 빵 냄새가 번지는 골목, 빵 한 봉지를 들고 셀카를 찍는 사람들의 표정. 단순히 빵을 먹는 일을 넘어, 지도를 그리고 골목을 탐험하며 줄을 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재미가 된 것이다.

여기에 대전만의 자산들이 더해지며 잼의 종류는 한층 풍성해지고 있다. 대덕연구개발특구를 활용한 '사이언스 잼'이 그렇다. 연구소의 담장을 넘어온 과학 기술이 도심 속 축제와 야시장, 체험 프로그램으로 변모하며 시민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건네고 있다. 원도심의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작은 도서관과 북카페들이 은근한 '책잼'을 풍기고 있다. 빛바랜 나무문 옆에 손 글씨로 적힌 책 소개 문구 하나가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붙잡는 풍경은 어떤 기획된 볼거리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시는 조용히 사유의 공간으로 깊어진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대전이라는 도시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이 변화가 위에서 내려온 기획이나 예산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골목에 작은 가게를 연 청년들, 책방 한 편에서 낭독회를 열기 시작한 시민들이 먼저 움직였다. 도시의 경쟁력은 수천억 원짜리 콘크리트 랜드마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 즐기는 문화적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빵잼, 사이언스잼, 책잼이 어우러진 지금의 대전은, 시민의 일상이 예술이 되고 놀이가 되는 도시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 문화적 자산들을 어떻게 미래와 잇느냐 하는 점이다. AI와 기술이 일상이 된 시대에 도시 콘텐츠 개발은 거창하고 차가운 기술 과시가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문화들을 더 촘촘하게 잇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방문객의 취향에 맞는 맞춤형 문화 동선을 짜거나, 과학과 문학이 융합된 스토리텔링을 원도심 골목에 입히는 방식도 한 예가 될 것이다. 예컨대 골목 담벼락에 QR 코드 하나를 붙여두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나 그 골목이 품은 기록이 방문객의 손안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 기술이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문화 경험을 깊게 공감하는 도구로 쓰일 때, 도시의 매력은 배가될 것이다.

도시가 품은 고유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새롭게 엮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생길 때, 그것이 바로 강력한 도시 마케팅 아닐까. 화려한 홍보 문구보다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빵 한 조각, 밤하늘을 수놓은 과학 축제, 마음에 닿은 책 한 권의 기억이 사람들의 발길을 다시 이끄는 마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대전은 묵묵히 나라의 성장을 뒷받침한 조용한 모범생이었지만 지금의 대전은 온갖 매력적인 재료가 담겨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잼 항아리로 변모해 가고 있다. '노잼'의 껍질을 깨고 '다잼(多잼)'의 시대로 들어선 대전. 사람의 온기와 문화, 기술이 한데 어우러진 대전이 앞으로 어떤 맛을 낼지 기대해본다.

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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