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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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할매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6-03-09 17:11
  • 수정 2026-03-10 15:12
  • 신문게재 2026-03-10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풍경소리 김태열 수필가
김태열 수필가
손주가 새처럼 집안으로 날아왔다. 황석영 소설가의 '할매'라는 책의 첫 문장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개똥지빠귀라는 새가 팽나무의 열매를 먹고 배설한 씨앗에서 자라난 또 다른 팽나무는 조선과 현대 한국에 이르는 600여 년의 역사를 나이테 안에 새기고 있다'. 그 팽나무를 소설가는 생명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할매'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우리 집 팽나무의 그늘에서도 네 명의 손주가 자라고 있다. 아이들의 시간 속에 가족의 서사가 쌓여갈 것이다.

'할매'라는 이름, 조금 촌스럽지만 어릴 적에는 흔하게 들리는 이름이었다. 친척도 그렇고 주변 이웃집 할매들은 꼬마애들을 서로 손주처럼 돌보아주었다. 세월은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저출산 시대라 무늬만 할머니인 집도 제법 많다.

올 1월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윈난성에 다녀왔다. 여행 일정은 강행군이었다. 꽤 힘들었다. 귀국 후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쯤이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아내는 오전 11시 고속버스로 손주를 돌보러 가야 했다. 나는 여행 후유증으로 입안에 수포가 생기고 입술 가장자리가 짓물렀다, 아내도 힘들었을 텐데 사흘간 세 명의 손주를 챙겨야 했으니 오죽 힘들었겠는가.

잠깐 맑았다 흐려지기를 되풀이하는 게 세상살이다. 특히 손주가 생기다 보니 바람 잘 날 없다. 첫 손주 태어났을 때는 일 년, 그 후 손자 출산 때마다 한 달간의 돌봄이 따랐다. 자식 집에 무슨 일만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달려가야 한다. 다기능 할머니와 달리 딱히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나는 마음으로만 응원할 때가 많다.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갖가지 사연을 담은 팽나무들이 버티고 있다. 직접 손주를 키우는 모습을 보거나 듣고, 양육하게 된 사연을 귀동냥하면 안쓰러운 마음 한편으로 존경스럽다. 나날이 삭아 가는 그 나이에 자기 몸 돌보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자식들 처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녀를 결혼시켰으니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한 시간이라 여겼을 텐데, 발목이 잡혔다. 게다가 손주 돌보는 일은 사랑 더하기 돈 드는 노동이다. 쌈짓돈이 털리고 온몸으로 버티는 희생이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없다면 맞벌이 부부들은 기댈 곳이 없다. 외벌이로 육아를 감당하기에는 집값이 너무 올라 언제 집을 살 수 있을 희망을 엿볼 것이며, 형편이 나아진다는 기약도 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한 개인, 한 가정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한국은 근로에 의한 부의 축적보다 자본과 상속으로 부가 대물림되는 사회로 변했다. 출발선이 다르다. 그러니 부부가 같이 돈을 벌지 않고는 자산을 모으기는커녕 치솟는 전세조차 따라가기가 벅찬 지경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다. 시골이고 도시고 할 것 없이 심각한 수준이다. 충남 금산에서는 작년에 태어난 신생아가 117명인데 비해 돌아가신 어르신이 약 8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 공동체의 기반이 뿌리부터 잠식되어 가고 있다는 수치다. 이는 일회용 사건이 아니라서 세대 단절은 점점 빨라질 수 있다. 세대를 잇는다는 것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공자가 지었다고 하는 주역 계사전에 이어주는 것은 선하다(繼之者 善也)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공자도 자기가 한 일은 선대의 전적을 풀어내 그 시대에 이어준 것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지금 우리 할머니들은 세대를 온몸으로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결혼율과 출산율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이 땅의 할매들이 곳곳에서 팽나무처럼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한 한국 사회는 세대를 이어 나아갈 것이다. 그녀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일어난 의병과 같다. 부디 힘드시더라도 손주들이 성장해가는 시간을 몸의 나이테로 새겨서 이 땅을 지키는 팽나무의 이야기로 남아주셨으면 한다.

'이놈 손주야, 어디 있다 인제 오냐'는 웃음 어린 말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기를! /김태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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