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을 기리며

  • 오피니언
  • 목요광장

[목요광장]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을 기리며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장

  • 승인 2020-12-30 08:22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백낙천교수
백낙천 학장
주시경 선생은 확고한 언어 의식과 독창적인 이론을 토대로 국어 문법을 기술한 학자로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선생은 지금도 국어학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한 문법 체계는 현대 국어 문법의 이론적 틀을 마련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점에서 주시경 선생은 그 자체가 국어 문법 연구의 시작점이며 그의 문법 이론에 대한 계승, 발전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국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치달아 국권이 흔들리고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주시경 선생은 1876년 12월 2일 황해도 봉산에서 1녀 4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상주(尙州)로서 백운동서원을 세운 유학자 주세붕의 후손이며, 어릴 때 이름은 상호(相鎬)였다.



주시경 선생은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에 배재학당 교사였던 박세양, 정인덕 등에게 신학문을 배우면서 또 다른 세계와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됐다. 이어 1894년인 19세에 큰 뜻을 품고 배재학당에 입학해 학문에 매진하고 1900년 6월 25세의 나이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주시경은 21세인 1897년에 당시 나이 16세인 김명훈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으며, 슬하에 2녀 3남(솔메, 세매, 힌메, 봄메, 임메)을 두었고, 평생을 국어를 연구하고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계몽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더 큰 계획을 눈앞에 두고 1914년 불과 39세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했다.

주시경 선생의 학문은 크게 보아 문자론과 맞춤법, 음성학과 문법론, 사전 편찬의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 분야에서 선생의 업적은 우리말의 틀을 잡아 올바른 어문 생활을 교육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대한국어문법'(1906), '國語文典音學'(1908), '國語文法'(1910), '말의소리'(1914) 등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국어 문법의 규범적 기틀을 세우고 실용의 방편을 마련하는 데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 선생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1900년부터 한글을 가르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당시 배재학당 인근에는 휘문, 명신, 보성, 중앙, 진명, 경신, 숙명, 이화 등의 신학문 학교들이 모여 있었으며, 이곳을 동분서주하면서 주야로 국어를 가르치면서 백성의 계몽을 일깨웠다. 이때 얻은 별명이 '주보퉁이'인데,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을 보자기에 싸서 매고는 어디든 달려가 가르쳤던 주시경의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별칭이다.

1910년을 전후로 평안도·황해도 등 북서지역에서는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계가 중심이 돼 신문화 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급기야 1911년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하고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이른바 '105인 사건'(일명 신민회 사건)을 일으켰다.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주시경 선생이 교육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상동교회를 조선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거점 조직으로 간주하게 됐으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만주나 해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주시경 선생도 이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해 결국 고심 끝에 만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주시경 선생은 갑자기 끊어질 듯한 복통을 호소하고 며칠을 앓아눕다가 끝내 눈을 감고 말았으니 이때가 1914년 선생의 나이 39살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었던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혹독했던 시대 12월에 태어나 짧은 삶을 살았지만, 민족의 언어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힘쓴 주시경 선생을 떠올려 본다.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한우리·산호·개나리, 수정타운아파트 등 통합 재건축 준비 본격
  2. 대전충남통합市 명칭논란 재점화…"지역 정체·상징성 부족"
  3. 대전 유성 엑스포아파트 지구지정 입안제안 신청 '사업 본격화'
  4. <속보>갑천 파크골프장 무단조성 현장에 잔디 식재 정황…고발에도 공사 강행
  5. 대전교육청 종합청렴도 2등급→ 3등급 하락… 충남교육청 4등급
  1. 이재석 신임 금융감독원 대전세종충남지원장 부임
  2. 주택산업연구원 "내년 집값 서울·수도권 상승 유지 및 지방 상승 전환"
  3. 대전세종범죄피해자지원센터, 김치와 쇠고기, 떡 나눔 봉사 실시
  4. [행복한 대전교육 프로젝트] 대전둔곡초중, 좋은 관계와 습관을 실천하는 인재 육성
  5. 대전·충남 행정통합 속도...차기 교육감 선출은 어떻게 하나 '설왕설래'

헤드라인 뉴스


김태흠-이장우, 충남서 회동… 대전충남 행정통합 방안 논의

김태흠-이장우, 충남서 회동… 대전충남 행정통합 방안 논의

대전·충남 행정통합을 주도해온 김태흠 충남도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이 만났다. 양 시도지사는 회동 목적에 대해 최근 순수하게 마련한 대전·충남행정통합 특별법안이 축소될 우려가 있어 법안의 순수한 취지가 유지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고 밝혔다. 가장 이슈가 된 대전·충남광역시장 출마에 대해선 김 지사는 "지금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불출마 할 수도 있다 라고 한 부분에 대해선 지금도 생각은 같다"라고 말했다. 이장우 시장은 24일 충남도청을 방문, 김태흠 지사를 접견했다. 이 시장은 "김태흠..

정청래 "대전 충남 통합, 法통과 되면 한 달안에도 가능"
정청래 "대전 충남 통합, 法통과 되면 한 달안에도 가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24일 대전 충남 통합과 관련해 "충남 대전 통합은 여러 가지 행정 절차가 이미 진행되어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면 빠르면 한 달 안에도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대전·충남 통합 및 충청지역 발전 특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서울특별시 못지 않은 특별시로 만들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8일 대통령실에서 대전 충남 의원들과 오찬을 가진 자리에서 "내년 지방선거 때 통합단체장을 뽑자"고 제안한 것과 관련해 여당 차원에서 속도전을 다짐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백마강을 휘감아 도는 물길 위로 백제대교가 놓여 있다. 그 아래, 수북정과 자온대가 강변을 내려다본다. 자온대는 머리만 살짝 내민 바위 형상이 마치 엿보는 듯하다 하여 '규암(窺岩)'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 바위 아래 자리 잡은 규암나루는 조선 후기부터 전라도와 서울을 잇는 금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강경장, 홍산장, 은산장 등 인근 장터의 물자들이 규암 나루를 통해 서울까지 올라갔고, 나루터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과 상인들이 오고 가는 번화가였다. 그러나 1968년 백제대교가 개통하며 마을의 운명이 바뀌었다. 생활권이 부여읍으로 바..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크리스마스 분위기 고조시키는 대형 트리와 장식물 크리스마스 분위기 고조시키는 대형 트리와 장식물

  • 6·25 전사자 발굴유해 11위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 6·25 전사자 발굴유해 11위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

  •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 신나는 스케이트 신나는 스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