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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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만필]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

당진 신평중학교 이일석 교사

  • 승인 2024-07-18 10:26
  • 신문게재 2024-07-19 18면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20240718_당진 신평중 교사 이일석 (1)
이일석 교사
한 해가 마무리될 때면 저는 심하게 가슴앓이를 합니다. 사랑하는 님(?)과의 헤어짐이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저의 짝사랑의 대상인 아이들은 그들의 속도대로 한 해를 보내고 성장하며 시간 속으로 저를 스치듯이 지나가 버립니다.

뒤돌아보면, 교사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굴곡진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저의 열등감까지 더해져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신평의 아이들은 이 못난 저를 언제나 따뜻하게 품어주고 따라줬습니다.

교직 생활 동안 잊을 수 없는 학부모님도 만났습니다. 오래전 중3 담임을 하던 스승의 날에 예상하지 못한 탐스러운 빨강 장미 바구니가 교무실로 배달됐습니다. 우리 반 '현'이 어머니가 보내셨습니다. '현'이는 늘 말이 없고 말을 붙이면 두 볼이 빨갛게 변하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너무 뜻밖이라 전화를 드리니 어머니는 대화 끝에 외동인 '우리 아기' 잘 부탁한다며,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달할 수 있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달여 시간이 흐른 여름 방학 중에 갑자기 '현'이의 전화가 왔습니다. 이후 병세가 깊으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지금은 30대 후반이 되어 사회인이 됐을 '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참 먹먹해집니다. 보고 싶습니다. 제가 할 말이 있거든요. 엄마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마음에 꽁꽁 간직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꼭 다짐을 받고 싶습니다.

오해를 풀고 싶은 학생들도 있습니다. 28년 전 저는 결혼해서 5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어 주변의 성화로 서울 모처에 가서 기도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해 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절대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신평까지 말을 하지 말라니, 정말 힘든 미션이었지만 저는 너무나 절실했습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신평'이라고 쓴 종이를 보이고 티켓을 끊어 간신히 버스에 올라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탄 버스에서 여대생 두 명이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반가워요! 안녕하셨어요?"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반가움의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해 마침 들고 있던 신문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한 명의 친구가 신문을 손으로 잡으며 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고, 저는 필사적으로 신문을 잡으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제야 그 친구들은 이 괴이한 상황에 난감해하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선생님을 원망했을까요. 얘들아! 정말 미안하구나.



어느 날,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꽤 두툼한데 '00생명'이란 박스에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난 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선뜻 박스를 열지 못했습니다. "보험 가입하라고 선물 보냈구나. 은사를 이렇게 써먹네"라며 속상해했습니다. 그래도 예의상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아이들 키우고 중년이 된 제자는 학창 시절의 선생님이 떠올라 화장품 회사 연구원인 남편에게 부탁해 화장품을 손수 제작했다고 합니다. 아낌없이 사용하시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신평에서의 학창 시절을 삶의 보물처럼 꺼내보는 제자의 마음속 얘기를 들으면서 저의 부족함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렇듯 소중한 인연을 귀한 줄도 모르고 넘겼던 시간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저는 오늘도 교실 문을 열고 학생들의 기억 속에 보물처럼 담길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군가 제게 "너의 인생의 화양연화는?"하고 묻는다면 저는 막힘없이 "교사로서 신평의 아이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한 저에게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었던 우리 아이들이 훌륭히 성장해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나날들을 보내시길 저는 온 마음을 다해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당진 신평중학교 이일석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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