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강세황의 <자화상>, 노마지지(老馬之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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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강세황의 <자화상>, 노마지지(老馬之智)

양동길/시인, 수필가

  • 승인 2025-01-31 08:57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노마지지(老馬之智)란 사자성어가 있다. 늙은 말의 지혜라고 풀이하지만, 유래는 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것이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후퇴하던 군사가 길 잃고 헤맬 때, 명재상 관중(管仲)이 경험 많은 늙은 말을 앞세워 퇴로로 안전하게 회군하였다. 경험의 소중함,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저마다 쓰일 곳, 역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세황(姜世晃, 1713 ~ 1791, 문인화가)은 조선화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사대부로서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높은 식견과 안목, 풍부한 서화 이론으로 화평(畵評)에도 탁월하여 당시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 시대 풍미한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같은 제자도 두어, 예원의 총수로 불리기도 한다.



삶이 저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공통된 부분이 많다. 강세황은 외려 평범한 것이 드물다. 강세황은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강현이 유배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운다. 스무 살에 양부모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된다. 살림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책만 읽었다. 그 아내마저 마흔 네 살에 세상을 떠나, 네 아들을 보살피며 어렵게 살았다. 영조의 배려라고는 하나, 환갑이 지나서야 벼슬길에 오른다. 64세에 기로과(耆老科), 66세에 문신정시에 장원을 차지한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 정이품, 현 서울시장)에 이른다. 조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 정이품 이상이고 나이가 70세 이상인 원로 문신을 예우하기 위한 친목 기구)에 들어감으로서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도 얻는다. 75세에 북경에 다녀왔으며, 76세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78세(1790)에 지중추(知中樞)가 되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인생은 육십부터란 요즘 세간의 말에 썩 잘 부합한다.

어려서부터 등에 표범 무늬가 있어 표암(豹菴)이란 호를 얻었는데, 유달리 많은 호를 사용한 것도 특별하다. 표암 외에 견암(?菴), 노죽(露竹), 무한경루(無限景樓), 박암(樸菴), 산향재(山響齋), 의산자(宜山子), 첨재(?齋),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홍엽상서(紅葉尙書) 등을 사용했다.



많은 화가와 교유한 탓인지 초상화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자서전 『정춘루첩(靜春樓帖)』에 수록된 <자화상>, <70세 자화상> 등 4점의 자화상이 있는가 하면, 한종유가 제작한 <강세황 육십구세상>,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화> 등 8폭의 초상화가 있다. 초상화가 이리 많은 경우도 없고, 다양한 형태로 그려진 경우도 없다. <70세 자화상> 같은 전신자화상은 조선시대 자화상 중 유일하다. 한종유의 <강세황 육십구세상>은 선면에 그렸는데, 그 또한 처음이며, 주인공이 미소 띠고 있는 것도 드문 경우이다.

그림은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 이다. 70세인 1782년에 그렸다. 본인의 인생 역정을 담아내는데 진력한 모양이다. 눈빛은 형형하지만, 얼굴엔 주름이 깊다. 요란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 성찰하는 성품과 내면의 깊이를 더한다. 김용관 저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에 의하면 "정신만을 잡아 그렸기 때문에 속된 화공이 그저 모습으로 묘사한 것과 현저히 달랐다." 강세황 자신이 스스로 극찬하기도 했다 한다.

강세황
강세황, <자화상>, 1782, 비단에 채색, 88.7×51.0cm, 보물 제590호, 진주강씨 전세품, 국립중앙박물관
옷은 평상복인데 머리에는 관복 입을 때 쓰는 오사모(烏紗帽)를 썼다. 왜일까? 얼굴 양쪽에 쓴 찬문에 그 속내를 내보인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오사모 쓰고 평상복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있고 이름은 조정에 있네. 가슴에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을 흔드나, 세상 사람이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노인의 나이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다. 때는 임인년(1782, 정조 6)이다." 마음은 초야에 머물고 싶은데, 몸이 관직에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긍지와 자부심도 대단하였지만, 주위의 눈길 보다 스스로의 즐거움에 초점이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았을까?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사모관대 정장본)>에는 조윤형(曹允亨)이 쓴 어제제문(御製祭文)이 있다. "툭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 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이 삼가 쓰다." 문예적 소양과 심미적 취양, 문화적 위상, 사랑이 담겨있다.

강세황은 60세 넘어 시작했어도 뛰어난 업적을 수없이 남겼다. 누구에게나 차별화된 경륜과 지혜가 있다. "그대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오평선이 지은 책 이름, 그대로다. 보다 유익하게 숙성돼 가는 것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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