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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경제부 차장 |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국이 요구한 3500억 달러 규모의 현금투자였다. 그것은 '선물'이었고, 심지어 '선불'이었다. 한국인이 미국 땅에 씨를 뿌려 경작했는데, 미국인이 결실을 수확하겠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았다. 다만, 애초에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시작된 협상이었기에 무리한 요구라도 수용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국내 여론은 출렁였다. 초기에는 조속히 협상을 매듭짓자는 분위기가 우세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기류가 바뀌었다. 일본이 미국과 맺은 협약이 모두 내준 백기 투항이었다는,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운 을사늑약이 국민 뇌리에 오버랩되면서 회의론에 힘이 실렸다. 여기에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구금사태는 여론에 기름을 부었고, 단순 무역협상이 아닌 '경제 주권'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굳건한 한미동맹도 절실한 이재명 정부가 꺼내든 협상 카드는 '무제한 통화스와프'였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이 아닌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의결이 필요한 사안으로, 시간을 벌기 위한 묘수였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우리나라 입장에서 통화스와프 없이 관세협상을 맺을 경우, 1997년 IMF 사태와 같은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 때문에 정부도 통화스와프는 협상의 필수 조건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 대통령도 "사인하면 내가 탄핵당할 것"이라고 미국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원하는 3500억 달러는 원화 기준으로 490조 원으로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84%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를 수용할 경우 원·달러 환율이 2000원을 넘겨, 원화 가치 하락과 국가 신뢰도 추락으로 산업 전반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어떠한가. 연일 관세협상을 두고 네 탓 공방으로 공회전하고 있다. 여당은 다수당의 지위로 각종 입법을 강행하고 있으며, 야당은 반미정권이라며 트집 잡기를 일삼는다. 정치가 분열되자 국민들도 진영논리에 매몰된 모습이다. 산업계에서 요구하는 실질적인 피해대책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한 지역 경제단체 관계자에게 들은 말이다. "정치권이나 여론이나 진영논리로 반미냐 친미냐, 반중이냐 친중이냐 다투는 데, 일단 우리부터 살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쩌면 지금이 우리의 30년을 결정짓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소모적인 진영논리보단 건설적인 생존전략을 찾아야 할 때다. /김흥수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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