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평범함이 감춘 선물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평범함이 감춘 선물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6-01-19 16:50
  • 신문게재 2026-01-20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풍경소리 김태열 수필가
김태열 수필가
달력 위에서 한해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마음은 부산하다. 또 맞이하는 새해지만 올해의 계획들이 농부가 씨를 뿌리듯 마음속에 심어지고 있다. 이윽고 그중 몇 개는 발아하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한해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삶은 강물처럼 이어지는 흐름이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 속에 이런저런 경험들로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이처럼 한해의 끝과 시작점에서 불현듯 오래전 한 시인이 남긴 일화가 떠오른다.

중국의 시인이지만 고려 시대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소동파는 과거에 급제하여 부귀를 누리다가 정치적 사건으로 세 번에 걸쳐 유배된다. 지금의 하이난에서 3년간의 마지막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할 때 젊은 시절 관리 생활을 했던 곳에 있는 금산사에 들른다. 그곳에는 친구인 이공린이 그려준 그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호기로운 모습 위에 그는 자신의 삶을 '자제금산화상(自題金山畵像)'이란 한 수의 시로 정리한다.

마음은 이미 타 버린 재와 같고 몸은 묶이지 않는 배와 같다네. 그대에게 묻노니 평생 이룬 공적이 무엇인가. 황주·혜주·담주에서의 일이라네(心似已灰之木 身如不繫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擔州). 마음속에서 부유하던 갖가지 미련과 집착을 떨쳐버리니 생애에서 이룬 가장 큰 일은 부귀와 공명에 있지 않았단다. 오히려 유배 생활을 했던 곳에서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다산도 그와 같은 길을 걸었기에 지금도 우리 곁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고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관성처럼 올려만 보던 삶의 궤도에서는 세상이 그려준 꽃에 가려 일상의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 타인에 의해 길러진 특별함의 가치에서 내려와야 비로소 발을 디디고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 속에서 자신만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월급에 매여 사는 우리도 자식들 키우고 먹고사는 문제에 갇혀 있을 때는 그 시절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세월의 한 구비를 지나고 나서야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때가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지난 연말에 한 권의 책을 읽어보았다. 평범함의 의미가 새로이 다가왔다. 체코의 국민 작가인 카렐 차베크가 쓴 '평범한 인생'이었다. 주인공의 독백 같은 소리가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수건 한 장을 찾을 때나 침대 밑에서 슬리퍼 한 짝을 꺼낼 때마다 나는 얼마나 (아내의) 커다란 사랑과 배려가 그 질서 속에, 그 모든 것 속에 담겨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결국 미래를 위해 저당 잡혀 지나쳐버린 시간이 평범함이 주는 선물이었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순간인 것이다.

속도와 효율화, 돈으로 대변되는 세상은 평범함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사이버 공간은 더더욱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나의 가치를 따라야 행복하다며 갖가지 사진과 주장들이 난무한다. 특별함으로 무장한 이들이 구축한 감정회로는 꽃이 벌을 유도하듯 우리를 자극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분노 미끼(rage bait)를 선정했다. 분노라는 개인의 감정이 타인에 의해 SNS에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미끼로 이용되는 현상이다. 평범함으로 얻을 수 없는 도파민 중독 사회에서 '화'와 같은 감정을 유도해 상품으로 만들려는 교묘한 상술은 더욱더 극성을 부릴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진짜 같은 가짜, 눈요기와 감정의 뻥튀기가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 나의 귀한 시간과 감정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인 줄 아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보았던 밤하늘의 무수한 별이 그립다. 별을 볼 수 없는 세상만큼 우리의 동심도 잃어버렸다. 새해에는 마음속에서 세상사로 묻힌 동심의 별들을 다시 찾아보면 어떨까. 벌써 봄기운이 깊은 땅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봄날을 알리는 목련의 커진 꽃망울의 속삭임처럼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고 소박한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김태열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시 국방 과학수도 날개단다
  2. [우리동네 정비사업] 대전 대표 노후지 대덕구, 사업성 악화로 상당수 정비사업 '제동'
  3. [편집국에서]대한민국 축구와 민선9기 대전시
  4. "논쟁 휘둘려 기회 놓치면 안돼"…연내 특별법 제정 역량결집 시급
  5. [현장취재]크리스천리더스클럽, 제주헤리티지로 비전트립 다녀오다
  1. [월요논단] '온통대전'을 넘어, 시민이 설계하는 고향사랑기부제
  2. [옅어진 대전 문인의 흔적] 단재도 서포도 백호도…대전만 낯선 지역의 인문자산
  3. 무더위 피해 서점에서 북캉스
  4. 장마 주춤한 사이 활짝 핀 개망초
  5. 검찰청 폐지 석달도 안 남아… 보완수사·경찰 인사까지 여전히 혼선

헤드라인 뉴스


정부 공공기관 이전 앞두고 민선 9기 대전시 역량 시험대

정부 공공기관 이전 앞두고 민선 9기 대전시 역량 시험대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 계획 발표가 임박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지역 발전에 견인할 핵심 공기업 유치를 위한 대전시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1차 공공기관 이전 당시 철저히 배제된 만큼, 혁신도시 완성을 통한 원도심 활성화·도심 균형발전을 이루기 위한 기관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20일 지역 정치권과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안에 2차 공공기관 이전 내용을 발표할 방침이다. 김윤덕 국토부 장관이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실무적인 부분은 상당 부분 진행됐고, 가능하면 8월이나 늦어도 9월까지는 윤곽을 마련해 대통령께..

한화, 불펜 흔들리고 중심타선 공백…후반기 전력 어쩌나
한화, 불펜 흔들리고 중심타선 공백…후반기 전력 어쩌나

후반기 반등을 노리는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전력에 경고등이 켜졌다. 불펜이 흔들리며 마운드 운영에 부담이 커진 가운데 새 외국인 투수를 영입해 선발진 재정비에 나섰지만, 중심타선마저 부상 악재를 맞으며 전력 운용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화가 후반기 첫 과제로 떠오른 숙제는 불펜이다. 키움 히어로즈와의 후반기 첫 4연전에서 리드를 지키지 못하는 장면을 반복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19일 경기에서는 8-1로 앞서던 승부를 지키지 못한 채 연장 11회 9-9 무승부로 마무리했다. 류현진의 한·미 통산 2500탈삼진이라는 대기록과..

충남문화관광재단 대표 인선 논란 증폭…박수현 지사 인사 잡음 잇따라
충남문화관광재단 대표 인선 논란 증폭…박수현 지사 인사 잡음 잇따라

박수현 충남지사의 취임 이후 인선을 둘러싼 잡음이 잇따르고 있다. 정무부지사 임명을 둘러싼 논란과 민선 9기 도정 첫 조직개편에 대한 비판에 이어 이번에는 충남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 임용 절차를 놓고 노동조합이 특정 자격 미달 인사를 위한 '맞춤형 규정 개정' 의혹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면서다. 지역 시민사회에 이어 공직사회와 산하기관 노동조합까지 잇따라 인사와 조직 운영을 둘러싼 문제를 제기하면서 박 지사의 첫 인선 기조가 연이어 시험대에 오르는 모습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충남문화관광재단지회는 20일 성명을 통해 "충남도와 재단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함께 지킨 자유, 영원한 감사’ ‘함께 지킨 자유, 영원한 감사’

  • 전통시장에 바람이 솔솔…‘시원하게 장보세요’ 전통시장에 바람이 솔솔…‘시원하게 장보세요’

  • 장마 주춤한 사이 활짝 핀 개망초 장마 주춤한 사이 활짝 핀 개망초

  • 무더위 피해 서점에서 북캉스 무더위 피해 서점에서 북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