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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참수된 이들의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을 형법의 일반법으로 적용했다. 가장 중대한 범죄는 모반(謀反)과 대역, 모반(謀叛)이었다.
모반대역죄인은 능지처사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형, 16세 이하의 아들과 모, 처첩, 조손, 형제·자매, 아들의 처첩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이 됐다. 백숙부와 조카는 '유3천리안치형'에 처했다. 모반(謀叛) 죄인은 참형에 처하고 처첩과 자녀는 공신가의 노비로 삼았다. 부모와 조손, 형제는 '유2천리안치형'에 처했다. 유3천리안치형. 형기는 종신이지만 노역을 하지 않는 유배형의 일종이다. 이 형벌은 유배를 보내는데, 3000리(里) 밖으로 보낸 후 주거를 제한한 형벌이다.
그런데 3000리면 1178㎞에 달하는 거리다. 현재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통상 500㎞라고 한다. 다시 말해,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 1178㎞나 떨어진 곳은 조선의 영토가 아니다. 당시로 따지면 명나라나 일본까지 가야 한다는 얘기다. 영토가 넓은 대명률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 실정에 맞지도 않은 대명률 형법에 명시된 유3천리안치형은 어떻게 적용했을까.
통상 전라도 출신 죄인이면 경상도와 강원도, 함경도로, 함경도 출신이면 강원도나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유배를 보냈다. 도저히 1000㎞를 넘을 수 없는 거리다. 그래서 적용한 방식은 '돌고 돌아'다. 다시 말해, 죄수를 유배지로 보낼 때 곧바로 유배지로 가지 않고 빙빙 돌고 돌아서 거리를 채우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조선 실정에 딱 맞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유 2000리는 거주지로부터 600리(230㎞) 밖 고을, 유 2500리는 750리(294㎞) 밖 고을, 유 3000리는 900리(353㎞) 밖 '해변고을'이 유배지였다. 거의 전 국토가 유배지였다고 할 수 있다.
윤희진·취재 1부 행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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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진·취재 1부 행정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