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변선우 시인의 시를 음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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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변선우 시인의 시를 음미하다

  • 승인 2025-04-16 13:56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변선우_사진(새)
변선우 시인
근래 변선우 시인과의 만남이 즐겁다.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때는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복도>로 당선됐을 때다. 당시 평가가 좋아서 시인을 보고 싶었지만 그뿐이었다. 그후 시집 『비세계』, 시산문집 『와글와글』, 연구서 『1990년대 한국 현대시의 의미』, 『공생과 회복』 출간, 시인의 소식을 들었다.

때때로 어항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열대어를 바라보듯 그의 시에 빠져들던 중 우연히 시인을 만났다. 나는 반가워서 광팬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시인은 그날 마침 시산문집 『와글와글』을 출간했다며, 선뜻 1권을 내밀었다. 나는 귀가해서 와글와글을 한 장씩 넘겨보다가 잠시 숨을 고른다. 예상대로 내게는 넘사벽이다. 그런데도 호기롭게 시산문집을 한 장씩 넘겼다. 시선이 멈춘다.



너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한 스쿱 받쳐 들고 창문 앞에 서 있/다. 맨손에 시려움에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루돌프를 사로/잡아 뒷다릿살 취하여, 성글고 둥글게 뭉쳐 너의 옆에 선다. 또한/받쳐 들고, 행동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구억 년이 흘러 버렸다.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은 흥건해진 채 박제되었고, 루돌프의 뒷다릿/살은 부패하여 악취를 풍기게 되었다. 우리는 멀쩡하게, 투병처/럼 머물러 있다./사랑_영원히 밤 '시산문집 『와글와글』중에서 발췌'

시인은 1993년 대전 출생으로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책을 많이 읽어 상을 받기도 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공지영 소설 『봉순이 언니』가 시인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주인공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봉순이 언니'의 기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인데, 시인은 어린 나이임에도 그때부터 글의 힘, 글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향력 같은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고 싶던 것은 아니다.



시인이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취업을 잘하려면 좋은 학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학점을 잘 준다고 들은 선생님의 시 수업을 들었다. 학점을 잘 받으려니 열심히 쓸 수밖에 없었다. 매주 창작시를 내면 가산점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매주 새롭게 시를 써서 제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본인이 지도하는 스터디가 있는데, 거기 들어오라고 했다. 학점만 잘 받으면 되었는데, 무척 놀랐다. 아마도 그 선생은 시인한테서 뭔가를 발견했던 것 같다.

시인은 그때부터 시 합평하는 스터디에 나갔고,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정말 운명처럼. 취업 준비를 위해 토익 900점 등 다양한 스펙을 만들어 놓았는데 말이다. 무작정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취업 대신 대학원에 입학했다니, 사람의 운명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같다. 시인은 시 쓴 것을 후회한 순간도 있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박상순 시인이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여러 자리에서 고백했다. 박 시인이 발휘하는 서정적이고도 모던한 감각이 너무 좋다고, 그분의 시는 어떻게 읽으면 서정시처럼 읽히고, 어떻게 읽으면 정말 심오하게 여겨진단다. 그래서 박상순 선생의 시집을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로 삼아 연구하기도 했다. 평생 한 시인만 연구하라고 한다면, 시인은 단연코 박상순 시 연구자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토록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시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사실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뭔가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물었다. ㅡ저에게는 '우연'이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저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거나, 시에 저의 몸과 마음, 정신을 의탁하고 쓰고는 해요. 기꺼이 저를 시에다가 내어주는 것이지요. 모든 시가 그렇게 쓰인 것은 아닌데, 그러한 경향이 짙어요. 즉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시에 저를 내어주다 보면 우연히 발생하는 표현들을 만나게 돼요.ㅡ 시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비세계』의 첫 번째 시 「비세계」가 생각난다.

세계를 발명하였어요. 이 말은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의 다름 아녜요. 나는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 새하얗기도 하고 새카맣기도 하는 세계가 펼쳐졌어요. 복판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살충제 마신 벌레들처럼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었어요. 바라던 광경이었어요. 너무도 돌아왔어요.

실신한 사람들에게 다가갔어요. 유목민처럼. 실신에 더욱 가까워졌어요. 주인공처럼. 실신의 복판에 도착하여, 한 사람의 얼굴을 빗겨 보았어요. 그러자 그는 몸을 비틀었습니다. 서둘러 손을 거두었고, 사람들처럼, 옷을 벗고 누웠어요. 몸을 말았어요. 보조개처럼.

위 시는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비세계」 연작 중 한 편이다. 시인은 말했다. "여러모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위 시에 짙게 깔려 있는 '혼자'와 '함께'의 의미에 조금 탐닉해 보셨으면 해요. 위 시의 주체는 혼자가 되기 위해 '비세계'에 입장해요.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고, 이윽고 시의 말미에서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회복하는 듯한 이야기가 전개돼요. 그러니까 혼자 있기 위해 다른 세계로 떠난 시의 주체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회복되는 모습을 통해 '혼자'와 '함께'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싶었어요." 내게는 다소 어렵다. 그러나 여운이 남는다.

나도 시를 쓰지만, 아직 습작 수준으로 문득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우울해지기도 한 걸 보면 내 생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 '시'라는 또 하나의 생이 자리한 것 같아 불안하다.

변 시인과의 만남이 부디 내게 빛이 되어 내 안에 잠들어있는 시의 언어가 깰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본다.

민순혜/시인, 수필가

민순혜 수필가
민순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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