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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지난 주 잦은 비·바람 탓인지 꽃향기 속 낙화의 모습처럼 괜스레 움츠러든 심사를 추스르기 위해 예술의 전당 <차인홍의 미러클 콘서트>를 찾았다. 대전 시민들에겐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이며 '휠체어는 나의 날개'로 친근한 차인홍 교수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67 <운명 교향곡> 지휘를 끝낸 후 앙코르곡으로 <You raise me up>을 DCMF오케스트라와의 바이올린 협연으로 이어졌다.
휠체어에 앉아 연주하기 전 차 교수의 "저의 음악세계를 이끌어준 이는 베토벤이었습니다. (그의 청력의 상실이란 고통을 이겨낸) 용기 말입니다. 그 용기는 '남이 나에게 베푸는 용기'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용기'를 말합니다. (때문에 제가 이 무대에 설 수 있고) 이렇게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살 수 있기에 감사합니다."라는 짧지만 울림 있는 멘트는 지금도 또렷하다.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용기'. 범박한 필자는 이 아포리즘을 음미하는데 무명의 연필심을 다듬고 있다. 흔히 용기라고 하면 숨겨져 있던 진실을 드러내어 생각하거나, 무엇보다도 공개적으로 어떤 행동을 보이는 것. 그리하여 찬사를 받고 보상으로 상을 받는 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용기(courage)란 말은 본래 라틴어로 심장 혹은 마음을 뜻하는 'cor'에서 왔기에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함으로써 마음을 말하다"라는 내면을 향하는 은유적 함의를 부추기고 있다. 하여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의 사유를 시험(試驗)하는 리트머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베토벤)이 우리에게 베푼 용기'는 영혼의 소리마저 듣지 못하게 되어 유서까지 쓰기에 이른, 청력손실로 인한 극심한 정서적(실연, 절망, 고독) 상처를 환희와 희망이란 운명의 문을 두드린 '음악으로 창조된 심미적 삶'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내(차인홍)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용기'는 신체적(소아마비) 손실과 사회경제적 빈한함과 심적 혼란스러움을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갖고 있는 취약성만이 유일한 지향점이고, 유일한 현실적 가능성임을 자기 몸과 세계에 깊숙이 자리 잡게 한 '음미하는 삶'의 발현으로 자리 잡는다.
이 때 음미하는 삶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란 사유의 씨앗을 뿌린 소크라테스를 소환한다. 그가 아테네 법정에서 행한 최후의 변론에서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을 통해 '아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란 깨달음의 열매를 남긴다. 우리가 용기 있게 겪어내는 삶 속에는 내재한 이룸과 성장의 즐거움뿐 아니라 좌절과 영락의 괴로움들도 그 마땅한 폭과 깊이에서 같이 공존한다. 다시 말하면 상처받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안으로 채찍질하며 살아냄을 뜻하는 궁리(窮理)의 동굴에서 나온 음미하는 삶 속의 용기의 다른 말일게다.
그렇다. 용기를 음미하며 사는 삶은 '나'가 일상의 모든 켜와 결, 굴곡과 주름들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훑어 내는 일에 다름 아닐 게다. 내일(29일: 사전투표일)부터 습한 열기를 품은 여름과 함께 민주주의 꽃이라 부르는 21대 대통령을 선택하는 날이 다가온다. 내가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지 음미해 보자. 그리곤 내가 나에게 베푸는 용기를 갖고 비록 작더라도 내 방식대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자. 모든 것은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다.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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